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맛본 자만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찬양하고 확신 가운데 들어갈 수 있다. 모래사막에서 외로이 밤을 지새우며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위험으로부터 보호와 인도를 받은 자가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나를 지켜주셨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사상이나 개념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므로 내가 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래서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이 내게 없으면 샘을 낸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믿음에 있어서는 그렇게 시샘을 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적다고 하셨다.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아브라함 그러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믿음이 엄청나게 큰 것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에게 임한 구원의 믿음이나 우리들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가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도 찾아 가셨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셨다. 즉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을 하여 주신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셨다. 사용하신 방법이 이방인을 만나면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복음을 듣고 순종을 하면 복이 임하는 것이고, 거부를 하게 되면 저주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전도의 사명과 특권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들의 전도의 행위를 통해서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과 구원은 들음에서 남으로 전도를 하는 것에 축복의 통로로 쓰임을 받고 있다. 이미 우리는 이것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도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을 받게 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기도를 하고 있다. 가지고 있지만 확인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늘 빈궁한 신앙생활을 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가 내 것과 동일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한 것들이 나에게도 약속한 것들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근거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다. 즉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먼저 임하였기 때문이고, 동일한 방법의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를 할 때에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약속이 나와의 약속이 되어서 그것이 근거가 되어 간구할 수 있다. 시 121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 찬양의 가사로 알려져 있다. 저자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들을 근거로 하여 구원을 호소하고 있고 간구하며 확신 가운데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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