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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신자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고백을 한다. 그런데 이 사랑을 이웃에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바리새인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찐빵에 앙꼬가 없으면 찐방이 아니다. 교회의 공동체나 그리스도인에게서 사랑이 없으면 가짜이다. 그런데 사랑을 외치면서 실체가 가짜인 공동체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 성경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살피려한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십자가가 나온다. 십자가는 용서와 사랑이다. 용서받을 자와 긍휼이 필요한 자에게 값없이 주신다. 가짜 공동체와 가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외치지면 자신을 위한 것으로 드러낸다. 경쟁적으로 봉사를 하는 이유는 나만 보상을 받겠다는 것이고, 자꾸 능력을 달라고 하는데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사랑으로 통제를 받는 곳이다. 사랑으로 통제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실천이 되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서로를 용서를 하고 시기와 질투가 없음이 당연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자만이 실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에서 십자가의 정신이 나오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정신이 아닌 사랑은 다 가짜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 사랑은 하나님이 죽으셔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신 후에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즉 죄인을 살리는 사랑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하나님이 죽으셔서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킨 ‘의‘ 이다. 십자가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았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음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십자가의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1) COVID-19 사태를 광야 길을 걷는 것으로 표현을 한다. 광야 모래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집도 짓지 못하여 삶이 안정적이지 않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데 성령께서 함께 시험을 받으러 간다. 왜 성령께서 함께 가실까에 대한 궁금함이 있다. 성경에서는 아담을 첫째 아담이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 한다. 첫째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벰에게 시험을 당할 때에 ‘내가 왜 하나님을 의존해’하는 교만이 있었다. 그러나 둘째 아담에게 실패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   시험의 내용이 돌을 떡덩이로 만들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답은 사람이 사는데 있어서 떡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먹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았는데 끝까지 순종한 자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음을 깨닫게 하셨다.   COVID-19 으로 교회의 신자들의 출석이 감소하였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떡덩이로 살겠다는 선택을 하였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말고 네 마음대로 살라고’ 하는 사탄의 시험에 넘어간 것이다.   사랑하는 엘파소열린문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마귀는 오늘도 우리를 시험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말고 네 마음대로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그 능력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는 오늘도 우리들에게 ‘네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아’ 하며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는 마귀를 능히 이기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권세가 함께 있습니다. 만일 이 능력이 없다면 성경적으로 판단을 하면 자칭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2020년에 있었던 일들 가운데 가장 큰 뉴스는 COVID-19 사태이다. 이 사태가 터지자 가장 먼저 거짓 소문을 전했던 자들이 적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임박하였다는 거짓이었다.   성경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는 자가 없다. 그래서 늘 깨어 있으라 한다. ‘늘 깨어 있으라’ 함은 기다리면서 생각을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인생의 길을 걷게 하시고 재능도 주셨는데 그것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말한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의 은혜를 주신 목적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의식을 갖고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게 하기 위함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평안을 얻고 어려울 때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기도함으로 해결하자는 믿음은 이기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흰 옷을 입고 등불을 비추며 살아야 한다. 책임의식을 갖고 살라는 것이다. 등불을 비추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왜야하면 그 사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란트의 이익을 남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익을 남긴다 함은 줄기에 붙어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으므로 의의 열매로 나타난다.   사랑하는 엘파소열린문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지상의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습니다. 알곡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만 가라지는 마귀의 지시를 따릅니다. 언제나 마귀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처럼 활동합니다. 그래서 혼란한 틈을 타서 거짓을 마구 뿌려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COVID-19 사태가 시작될 때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이 있었는지 기억하여 보십시오. 그런데 지금은 잠잠합니다. 또 다른 거짓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짓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본문의 말씀을 시편 27편에서 다윗의 기도로 해석하려 한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찾으며 무엇을 얻는 것인지를 알려는 것이다. 다윗은 성전에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할 수 있기에 그곳을 사모한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으로 임재를 상징한다.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과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생명과 뜻과 온 힘을 다하여 찾아야 한다. 그분을 밝히 보기 위해서는 생각과 몸이 집중을 하여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전에 베풀어 주셨던 은혜들이 생각남으로 인하여 인내하며 참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이 생긴다. 왜냐하면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서 구할 수 있고,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찾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게 되면 마침내 그분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시작을 한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끝이라 하는 말씀이 성경에 있다. 그 주권적인 역사하심이 나에게 임하였을 때에 그것을 은혜라고 한다. 그래서 택함을 받은 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계시와 뜻하심을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 그분의 계시의 비밀을 풀어주는 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사랑하는 엘파소열린문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기도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다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대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기도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택함을 받은 자들의 약속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약속의 말씀이라 하는데 우리들의 손에 있는 성경말씀입니다. 성경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인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2020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심한 고통을 겪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진 자와 없는 자들 모두가 두려움과 근심 속에서 지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새 해를 맞이하여야 하는 부담감이 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얻을 수 있다. 본문은 다윗이 그의 아들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찾고 있는 상황을 통하여 지혜를 깨닫는다. 다윗은 쫓기다가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 먼저는 사울에게 쫓길 때이고 다음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길에 있을 때이다. 본문의 말씀은 압살롬에게 쫓기고 있을 때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내용이다. 그런데 기도의 내용을 보면 여유가 있고 확신에 차 있다. 그 이유는 이미 사울의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통하여 사울에게서 생명을 지키고 이스라엘에 왕이 되었다. 그래서 그때에 붙잡았던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지금도 붙겠다는 다윗의 굳센 의지이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를 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것이다.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인 성전에 올라가야 한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에 적당히 찾으면 안 된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 4:29)   하나님을 찾는데 마음과 생명과 뜻과 힘을 다하여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그분 앞에서 교제하며 구원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윗은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리라고 한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여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분이 오셨을 때에는 우리는 죄인이었으며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 아브라함도 이방신을 섬기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였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 24:2).   하나님의 구원은 아브라함에게나 우리들에게나 동일한 것이다.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죄인 되었을 때이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의로움을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 그분의 성품을 닮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도록 역사하신 성령께서 우리들과도 함께 하심으로 말씀을 깨닫고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 사랑하는 엘파소열린문장로교회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심은 하나님 율법의 말씀을 깨닫고 지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나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나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6-48) 동정녀 마리아는 자기 몸에 성령으로 잉태가 되었을 때에 어떻게 찬양을 하였을까? 본문의 말씀을 보면 마리아는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에 살던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기를 갈망하였다. 마지막 선지가가 오면 메시야가 온다고 계시하셨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먼저 이 땅에 왔고 육 개월 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을 하신 것이다. 마리아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찬양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기도할 때마다 메시야를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였는데, 그 은혜가 내게 임하였음을 찬양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비천한 여인을 통하여 계시를 성취하시려 함에 찬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먼저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자신에게도 찾아오심을 감사하고 있다. 즉 마리아의 찬양은 부족한 여종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에 쓰임받고 있음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동정녀 마리아에게 먼저 찾아가신 것같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였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자손을 약속하시고,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취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택함을 받은 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과 성취하신 것을 베풀어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은혜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찬양이 우리들의 찬송이 되어야 한다. 미천한 자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신다. 사랑하는 엘파소열린문장로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자신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 일을 맡기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기쁨입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룻 4:6) 죽은 자의 기업을 무르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가까운 친척이어야 하고, 재력이 있어야 하고,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보아스가 룻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에 올라가 엘리멜렉과 가까운 자를 만난다. 그는 엘리멜렉의 땅을 사게 되면 자신의 재산이 될 것을 생각하고 승낙을 하였다. 그런데 그 땅을 사게 되면, 룻의 아들의 것이 되고, 더 나아가 룻과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아 엘리멜렉의 가문을 잇게 하여야 함을 알고는 포기를 한다. 기업 무를 자의 자격을 포기하는 증거는 신을 벗는다.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룻 4:8). 신을 벗는 행위는 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보아스가 이제 엘리멜렉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룻과 결혼할 것을 성문 앞 장로들에게 확인을 받았다. 그래서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룻 4:13) 아들의 이름은 오벳이다. 유다의 족보는 계대법으로 시작이 된다.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 동침을 하여 낳은 아들 베레스로 시작이 된다. 유다의 족보는 다윗의 족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다. 그런데 이 족보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족보라는 것이다. 가나안 여인 기생 라합이 살몬과 결혼을 하여 보아스를 낳았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 4:21-22)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며,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신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을 구하시려는 계획이 룻기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차별이 없고, 남자와 여자가 구별이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룻 3:12)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는 고엘의 법칙과 희년의 제도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을 하면 고엘과 희년의 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룻기 3장에서 보아스와 룻의 대화가 본문의 내용이다. ‘고엘‘이라는 것은 친족으로서의 역할, 즉 친족으로서의 책임을 말한다. 그래서 살인자를 보복하는 것, 토지 무르기, 종으로 팔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는 것을 담당한다. 나오미의 남편은 엘리멜렉이다. 그가 토지를 팔고 모압 땅으로 이주하였다가 죽었다. 그러면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이 상속자가 되는데 그들도 죽었다. 이제는 두 며느리에게 자격이 있다. 두 며느리 가운데 오르바는 모압 땅에 있고 룻은 베들레헴에 있다.   나오미는 남편의 토지를 찾기 위하여 며느리 룻에게 지시를 한다. 왜냐하면 기업을 무를 자를 친족 가운데서 찾아서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하고 토지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일이 룻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타작마당에서 자고 있는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룻이 들어간다. 잠에서 깨어난 보아스와 룻의 대화이다.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룻 3:9)하며 룻이 대답을 한다. 그러자 보아스가 대답을 한다.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룻 3:12). 무슨 말인가 하면 더 가까운 친족이 기업 무를 자로서 자격을 포기하면 내가 하겠다는 약속이다. 이와 같은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공동체 안에서는 당연한 것이 된다.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각 지파에게, 각 사람에게 주신 분복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만일 안타까운 사정이 생겨서 하나님의 분복을 빼앗기게 되었을 때는 친족이 책임을 다하는 제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룻 2:2) 룻기의 역사적 배경은 사사 기드온 때이다. 사사 시대의 특징은 민족의 지도자가 없으므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한 때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이스라엘 나라의 사회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 땅에 추수 때가 되면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땅에 떨어진 이삭을 자유롭게 줍을 수 있다. 만일 이렇게 행하지 않으면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가 펼쳐지지 않으므로 룻은 감독자에게 허락을 받고 이삭을 줍는다.   룻은 이방 모압의 여인으로 이스라엘 땅에서 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그의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요, 시부모를 잘 공경하는 며느리인 것이 베들레헴 지역에 소문이 났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녀의 발걸음을 그 지역의 유력자인 보아스의 땅으로 인도한 것이다. 보아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다. 그녀가 하루에 주었던 보리가 한 에바(약 23리터(L)이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자 이방여인을 통하여 이루신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유대인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방 땅에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하심의 은혜를 번성하게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의 복은 순종하는 자에게 풍성하게 임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을 받았지만 불순종하였다.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여호와에게 순종하면 다윗의 조상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참여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데 이방인도 사용하시는 풍성한 은혜를 베푸셨다. 교회에도 마찬가지이다. 오래 다녔다고 하나님께서 쓰임 받는 조건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구원받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도 예수 그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성탄절이 다가오면 빛으로 장식을 꾸민다. 그것은 하나님이 빛이심을 증거한다. 구약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빛으로 인식을 하고 있다. 빛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날이 성탄절이다.   지금도 이 땅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참 사람이시면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맹인의 비유가 등장을 하는 것이다.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은 빛이 있어서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눈이 감겨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맹인에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요 9:14). 어두움의 고통에서 벗어나 빛을 봄으로 인하여 얻는 평안의 안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다. 안식일 날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성전에 들어간다. 그러나 맹인은 들어 갈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을 뜨게 해주심으로 인하여 더 이상 맹인이 아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다. 지금도 이 땅에는 영적인 맹인들이 많다. 눈은 뜨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앞에 계시지만 하나님이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엘파소열린문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이 땅에는 빛의 자녀들과 어두움의 자식들로 나뉩니다. 어두움의 자식들은 죄의 본성으로 사는 자들로서 거짓과 시기와 살인하는 자들이며, 빛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행실을 보면 어느 쪽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시 26:8) 성탄축하 주일이다. 2020년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의 아픔을 겪었다.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들도 만날 수 없었고, 교회에서 예배도 행정명령 통제 하에 드려야 했다. 그러다보니 이번 성탄절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더 깊이 생각하게 한다.   시편 26편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 있다. 그가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인 언약적인 사랑이다.   그 사랑을 죄인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품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게 하신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을 주셨다. 다윗은 이 언약의 은혜를 믿고 하나님 앞에 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법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이다. 그래서 설령 잘못하였어도 사랑으로 용서를 받는다. 그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듯이 우리도 다윗처럼 당당히 설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인자하심에 있고, 용서받을 수 없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죄를 범한 자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를 받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탄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모퉁이 돌이 되셔서 세운 교회로 모인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 모퉁이 돌이 되신다고 함은 선지자와 사도의 가르침 위에 세워졌음을 말한다. 선지자와 사도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 함은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사랑하는 엘파소열린문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성탄 축하예배를 드리면서 그 큰 구원의 은혜가 이미 나에게 임하고 누리고 있음을 확인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죄를 속량하시러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 은혜를 믿는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천사들을 통하여 들었고 보았던 것을 교회와 신자들에게 전하는 내용이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셔서 만왕의 왕으로 계시면 모든 권세를 주관하고 계신다.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은 지금 죽어서 가도 천국은 좋은 곳임을 믿게 한다. 천국은 하나님과 어린양이 계시고 의와 희락과 화평이 있어 더 이상 고통이나 아픔이나 눈물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환난을 당하더라도 오래참음과 인내로 이겨야 한다. 또한 환란을 통하여 신자들의 믿음이 더 단련된다. 이제 신자들이 천국을 가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을 하셔야 한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을 통하여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총각과 처녀가 눈이 맞아서 결혼을 한다. 그러면 총각은 처녀의 아버지 집에 가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 아버지가 허락을 하면 정혼을 하게 된다. 그때에 포도주를 함께 마시며 약속을 하는데 이것은 피의 약속을 의미이다.   그런 다음에 총각은 자신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신부를 맞이할 집을 짓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신혼집이 다 되어 가면, 신랑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오라 한다. 그러면 신랑은 신부를 데려와 혼인 잔치를 벌인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신부를 택하시고 십자가의 피로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셔서 신부와 함께 거할 처소를 마련하고 계시는 중이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신부를 데려오라 하시면, 그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된다. 그러면 어린양과 신부들의 혼인 잔치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 오시는 날까지 택함을 받은 신부들은 정결하고 거룩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곳이 교회이다. 날마다 말씀으로 죄를 씻음으로 거룩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는 이미 계시된 말씀대로 전하여야 한다. 만일 그것에 더하거나, 빼면 재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