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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이번 주에는 지진 , 태풍 , 자연재해와 경제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소식이 전해졌다 . 이 세상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없다 . 인간의 지혜와 과학으로 암반 위에 세운 도시가 뉴욕의 맨하탄이다 . 그런데 이곳이 하늘에서 내린 비로 인하여 몇 시간 만에 초토화 되었다 . 사람들이 놀랐고 낙심 가운데 있다 .   인간의 인생사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 내가 생각하는 대로 쉽게 되는 것이 없다 . 그 대표적인 것이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 내 말을 듣지 않고 ,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우리는 성경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쉽게 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한다 . 그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세상은 죄로 인하여 만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 땅이 저주를 받아서 엉겅퀴와 가시나무를 내기 때문에 그것을 걷어내고 푸른 채소를 심어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   세상이 주는 달콤함에 썩어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 좋은 세상 살기 편한 세상을 만들어 준다고 하며 온갖 종류의 선심과 제도를 만들어 갔다 . 그 속에서 놀다가 보니 큰 일이 난 것이다 . 대한민국 한 가정 당 빚이 1 억 정도가 된다고 한다 . 이제야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다 . 그래서 새 옷을 사기보다는 헌 옷을 수선하여 입고 , 신발도 고쳐서 신는다고 한다 .   지구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30~40 년 동안 잘 먹고 잘 살았다 . 갖고 싶은 것 갖고 ,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는 것이 행복인줄 알고 살았다 .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 찬 백성들에게 박수와 찬사를 받기 위하여 나라의 정책도 무상이라는 단어가 당연한 것이 되었다 . 그러다 보니 이제는 나라들이 거지가 되었다 . 그래서 나라가 돈을 빌려야 형편이다 . 이 문제에 당면한 나라가 하나 둘이 아니다 .   세상은 살기가 힘든 곳이다 .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기독교 교리에 선택과 예정이라는 것이 있다 .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야곱과 에서가 태중에 있을 때에 장자가 아닌 차자가 선택을 받은 것으로 설명한다 . 즉 가업과 부족의 족장으로서 하여야 할 일을 장자가 아닌 차남을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신 것이다 . 그러나 야곱은 선택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순종을 하면 복이 저절로 임하는데 , 오히려 야곱은 인간의 생각으로 자신의 꾀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다가 어려움과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   이미 장자권이 야곱에게 있다는 것이 확정이 되었는데 , 야곱은 장자권을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사게 되는 것이다 . 야곱의 생각대로 장자권은 쥐게 되었지만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아야 한다 .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몸에 동물의 털을 두르고 아버지께 나아가 축복을 받는다 . 아버지와 에서를 속이므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게 되어서 삼촌의 집인 라반에게로 도망을 가게된다 .   그러나 도망을 가는 야곱을 하나님이 좇아가셔서 말씀하셨다 .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켜주겠노라고 약속을 하셨다 . 그러자 야곱은 만일 나를 다시 고향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 제단을 쌓을 것이며 ,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서원을 한다 .   20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다시 고향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 그러나 야곱에게는 커다란 고민과 걱정이 있는데 , 그것은 에서를 속이고 축복을 받은 것이었다 . 그래서 야곱은 자기의 지혜로 꾀를 짜내기 시작을 한다 . 처들과 자식들도 자기가 사랑하는 순서에 따라서 배열을 하고 많은 가축들은 떼를 나누어서 먼저 보낸다 . 그리고 혼자서 얍복 강가에 남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에서와 사백인의 군사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   그런데 여기에서도 야곱은 자신의 생각으로 에서를 판단을 한다 . 장자권을 팥 죽 한 그릇에 판 에서는 물질인 가축을 좋아할 것이라 하여 가축들을 먼저 보내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이 세상 사람들의 철학이나 지혜나 총명 가운데에 나타난다 . 뉴 밀레니엄 (New millennium) 이 시작되는 2000 년에는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희망과 환희에 차서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았다 . 그러나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아니 하였지만 지구 곳곳에서는 폭발음과 총성이 멎지를 아니하고 점점 냉전의 시대로 다시 돌아가려는 분위기이다 .   그 동안 과학자나 지혜 있는 자들이 미래를 향하여 각 자의 지혜를 발표하였는데 , 중동지방의 석유전쟁으로 인하여 제 3 차 대전이 시작될 것이라든지 , 또 핵무기의 오작동으로 인하여 지구를 멸망을 초래할 것이라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무서운 말들을 쏟아낸 일들이 있었다 . 그러나 저들이 예측한 대로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다 .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모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뜻에 따라서 지구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하시기 때문에 세상의 헛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한다 . 이것이 세상이 주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평안과 안식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   간혹 세상의 과학자들이 전하는 말을 근거로 하여 신자들을 혼란 가운데 빠트리는 자들이 있다 . 그것은 잘못된 교훈과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 이와 같은 자들과는 함께 친구도 되지 말고 또한 집안에도 들이지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은 어떠한 어려움과 환난을 맞이하여도 흔들리지 아니 한다 . 그 약속하심은 어떠한 경우에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 노아의 홍수 사건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 수 있다 . 하나님이 명령하신 약속을 믿고 순종하며 따랐던 노아는 일백 이십 년을 방주를 짓는 일에 열중하였다 . 그러나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는 동안

이는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이니라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우리나라 속담에 십 년의 세월이 지나면 강산이 변한다고 한다 . 그런데 기독교 내부에서도 세상이 변하고 있으니 우리들도 변하여야 한다고 했던 적이 있다 . 세상의 흐름에 뒤처지면 아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그러한 사람들에 의해서 세속적인 것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 그래서 한 동안은 경제학을 전공한 학사 출신의 목사나 의사 출신의 목사들이 인기가 있었다 . 교회도 기업체처럼 성장과 부흥을 시키는 것이 능력이며 자랑이었고 , 병들고 육신이 연약한 자들에게 건강세미나와 의학상식을 전하므로 교인들을 건강하게 살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   그러나 인간의 선조인 아담의 타락 이후에 세상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 인류가 해를 거듭할수록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에게 편리함과 안전한 사회적인 제도는 만들었지만 , 아직도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과 대적을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   먼 옛날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과 비기려 하였던 사람들이 있었고 , 약 일백 오십 년 전에는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였다는 창조설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자가 진화론을 주장함으로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지금도 진화론을 따르고 가르치고 있다 . 이와 같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속성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는 것이다 . 결국은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앉아서 영광을 차지하려는 자가 되려 한다 .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세우신 질서와 법칙이 있다 .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셨는데 ,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남자끼리도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 그래서 세상이라는 곳은 하나님이 없는 곳이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 자체가 핍박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 세상은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도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인정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알아야 할 기본적인 것들이 있다 . 먼저 하나님 나라에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 통치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숙지하여 하고 ,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깊은 생각이 있어야 한다 . 물론 깊은 생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   그의 나라 백성들은 왕의 권위와 은혜 아래에 있다 . 왕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믿음의 행위를 하여야 한다 . 이것이 구제 , 기도 금식이다 . 그런데 은밀하게 조용하게 제 삼자가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신다 . 하나님만이 듣고 알게 하라는 것이다 . 그러나 만일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 앞에서 자랑을 하기 위한 것이라면 상급이 없다고 한다 . 아니 오히려 죄를 범하는 것이다 .   세상에서도 구제를 장려하고 있다 . 기독교는 고급한 종교이다 . 세상의 학문이나 이방종교의 도는 하나님 말씀과 비교할 때는 초등학문이다 . 즉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   세상도 구제를 강요하는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어려움에만 관심이 있다 . 그러나 기독교의 구제는 어려움에 처하여 도움을 받는 사람의 인격과 영혼까지도 생각을 한다 . 도움을 주다가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즉 세상은 어려움에 대한 문제해결에 관심이 있고 , 기독교는 한 사람의 영혼과 인격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   사람은 아주 교만하다 . 그 교만함이 어느 정도인가하면 , 때로는 하나님도 마음에 들지 않고 ,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틀렸다고 한다 . 그래서 하나님도 마음에 들지 않고 어느 것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 그러나 사람은 그러한 것들을 판단을 하거나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 사람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의 잘남을 나타내기를 좋아한다 . 그러다보니 누군가를 정죄하고 비판을 하여야 상대적으로 잘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 자기의 잘남은 드러나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사람들은 만사형통이라는 단어를 아주 좋아 하는데 , 전에 이런 의미로도 쓰인 적이 있었다 . ‘ 모든 일은 대통령의 형을 통하면 다 된다 ’ 는 정치의 현실을 풍자하여 비꼬는 말이었다 . 그런데 신앙인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형통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 그러나 구원의 약속은 새사람이 되었으므로 심령이 새로운 자가 되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   만일 우리가운데 누군가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서 절음발이가 되었다고 하면 아마도 난리가 날 것이다 . 브니엘을 체험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서 ‘ 복을 주시지 아니하면 보내드릴 수 없다 ’ 고 하며 씨름을 하게 되었다 . 야곱은 환도뼈의 관절이 어긋나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 그리고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다 . 그 이름의 뜻은 ‘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 이다 .   겨루어 이긴 자는 상대의 것이 내 것이 되는 기쁨을 누린다 . 결국 하나님의 복을 취한 자가 되었다 .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취한 자가 되었지만 절음발이가 되었다 . 그러나 야곱은 그것에 대하여 불만을 갖지 않았으며 , 오히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자리로 더 적극적으로 나가는 자가 되었다 .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된다 . 그러나 바울의 앞길에는 우리들이 말하는 만사형통의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온갖 여러 종류의 고난과 고통을 당한다 . 사십 대를 맞으면 죽기 때문에 한 대를 감하여 때리는 매를 다섯 번이나 당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 돌로 맞아 죽을 줄 알고 성 밖으로 버려지는 일을 당하며 동족 유대인에게 고소를 당하여 감옥에 가기도 하였다 .   그렇게 됨으로 사도 바울의 몸에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와 흉터를 지니게 된다 . 그러나 바울은 그 상처를 원망을 하거나 흉터에 대하여 후회를 하지 않았다 . 오히려 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