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을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복음은 죄 가운데에 있는 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죄가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하면 복음의 내용은 주관적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먼저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 죄이면서, 죄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구원은 개인 개인에게 적용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은 개인의 구원에 초점이 이루어진다. 죄 가운데서 어리석은 삶을 살다가 새 생명을 얻음으로 인하여 소망에 찬 삶을 소개하므로 듣는 이로 하여금 소망과 기쁨의 자리로 옮겨 가게끔 하는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일들을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며 값을 치루시고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부를 비판을 하거나 다른 종교를 비방하기에 앞서서 먼저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여야 한다.
 
교회는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는 곳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새로워지는 것으로 야곱의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야곱은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체험을 하기 전에는 철저하게 개인 중심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서 가장 외롭고 고독한 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곳에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찾아오신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을 베풀어 주셨다. 야곱은 하나님께 매어달리며 복을 달라고 씨름을 하게 되며, 결국은 환도뼈가 부러지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또한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야곱은 비록 절음발이가 되었지만 그러나 그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였다. 과거의 삶의 모습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과거의 삶은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밖에는 몰랐던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변함으로 인하여 자기의 열두 아들을 위하여 축복의 기도를 해주기도 하며, 애굽의 바로 왕을 만나자 축복을 빌어주는 자로 변한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는 기쁨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구약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외면하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데, 노아의 홍수는 이미 백이십 년 동안 외쳤던 노아의 설교이었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은 외면하여 결국은 물의 심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죄로 인한 진노의 심판에 놓이게 된 인류를 구원하여 진노의 심판을 면하게 하는 일을 한다. 죄로 죽었던 자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여 새생명을 얻은 자로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사람을 생산하는 곳이지 세상이나 정부를 향하여 충고를 하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은 다시 태어난 자(born again)라고 하며, 교리적인 언어는 중생이라고 한다. 다시 태어난 자는 야곱처럼 야곱의 삶과 이스라엘의 삶이 명확히 구분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근거가 된다. 그런데 어떤 신자들은 복음을 사명으로 오해함으로 일이나 사업을 중심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마치 자신이 아니면 이 일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성품이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을 보전되었다 함이더라.”(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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