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의 게시물 표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인문철학과 세상 종교에서는 참된 나를 찾는다는 주제를 가지고 골몰하고 있다. 사람들이 세상의 삶을 살다가 보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고 살고 있기에 강의나 종교체험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 목적은 내 안에 참된 선을 발견하는데 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기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참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진지하게 자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잘잘못을 깨닫고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다짐을 한다. 그 과정을 마치면 정신적인 성숙함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철학과 세상종교에 대하여 말을 하였다면,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려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 대단한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흠이나 티가 있는 자는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은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것이다. 자신이 신분적으로는 의인이지만 죄의 성품으로 그릇된 행실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내가 누구인지를 늘 확인하는 것이 믿음의 생활이다.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에 넘어간 기독교가 되었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그저 명예와 부와 권력을 찾기에 바쁜 살찐 돼지로 키워가고 있다. 돼지는 결코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거나 성찰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참 진리가 무엇이며, 진리로 참 선을 추구하고, 참 선으로 아름다음을 추구하는 미가 있다. 이 땅에 세워진 교회와 신자들은 이것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TV ‘ 사람과 사람들 ’ 에서 본 이야기이다 . 전북 남원에 삼형제가 폐암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위하여 오래된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짓기로 했다 . 그래서 어머니가 가꾸어온 텃밭을 걷어내자 어머니가 우신다 . 마음의 고향의 흔적을 지우시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고 하신다 .   아버지는 극구 반대하신다 . 내가 살면 얼마나 사냐는 것이다 . 그런데 삼형제는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위하여 주말에 고향에 내려와서 손수 집을 짓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   병드신 삼형제의 아버지가 집 짓는 현장에 나와서 집을 짓고 계신다 . 아버지는 아들들을 위하여 집을 짓고 계시는 것이다 . 아버지의 손길에서 자식을 위한 사랑을 보여 주신다 . 자식들이 없을 때에 혼자 나오셔서 살며시 벽돌을 쌓고 계신다 .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는다고 하였다 . 주님을 위하여 , 모세를 위하여 , 엘리야를 위하여 짓는다고 하였다 . 생각을 해보니 막상 베드로를 위한 집은 없었다 . 얼마나 천국의 모습이 좋았으면 그랬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   그런데 우리의 천국 집은 주님이 지으신다 . 우리의 처소를 지으시기 위하여 천국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가셔서 우편에 앉아 계신다 . 그리고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것이다 .   “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요 14:3)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리스도인이 얻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 하나님의 선택이다 . 즉 우리가 얻은 구원은 성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다 . 그런데 구원의 가치를 아는 자는 자기의 소유를 판다고 한다 .   우리 주님은 그 귀한 가치를 밭에 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 우리가 좋아하는 다이아몬드가 있다 . 그런데 그 보석이 생성되는 과정을 보면 아주 놀랍다 . 다이아몬드는 단단하다 . 그래서 땅속 130Km 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고 한다 .   그리고 순수한 단단한 돌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없어야 한다 . 그래서 용암에 녹은 순수한 돌이어야 한다 . 그런 돌들이 용암이 지상으로 분출할 때에 밭에 묻히게 된 것이다 . 그런데 그것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   보석의 가치를 아는 자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고 한다 . 요한계시록에서 천국 성곽의 문이 12 개가 있는데 , 그 문이 하나의 진주로 되어 있다고 한다 ( 계 21:21). 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한다 .   구원의 가치를 아는 자는 자기의 소유를 다 판다고 하였다 . 구원은 사람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귀한 것이다 .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 주님을 따른다함은 나의 고집을 버리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   “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 마 13:46)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신자들은 찬양이나 기도 중에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가? 무엇 때문에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여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주님의 능력과 이적으로 공리적(자신의 공명과 이익)인 유익을 얻기 위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 신자들은 모든 문제의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에서 나타났다. 그러자 백성들은 두려워하였다. 즉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그래서 모세에게 부탁을 하였고,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고 왔다. 하나님을 만나고 온 모세에게는 광채가 빛났다. 백성들은 그 광채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두르고 백성들 앞에 섰다. 그래도 모세의 얼굴에는 영광의 광채가 빛났다. 이 사건으로 하나님은 어두움이 없으시고 빛으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면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광채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고후 4:6). 즉 주님을 만났다는 것은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빛이 들어오므로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주님의 영광을 보면 주님의 형상으로 변하게 된다. 즉 주님을 만난 자는 주님의 성품을 닮게 된다는 것이다. “주여 주여” 외치는 자는 많은데 주님의 성품을 닮은 자를 찾기가 너무 어렵다.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 .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마 1:21)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를 예수 그리스도가 건져내어 살리신다는 것이다 .   사람의 몸을 영과 육으로 나눈다 . 왜 이 문제가 중요한가 생각하여야 한다 . 즉 영혼 구원인가 ? 육체의 구원인가를 올바로 알므로 인하여 건전한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성경적인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영혼이 구원을 받고 ,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 때에 썩지 아니할 영원한 육체를 덧 입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자리로 나아온다는 것이다 .   영혼이 구원을 받은 자들은 예수의 영을 따라 행하게 된다 . 즉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행실을 죽이는 자리로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반드시 그의 영이 함께 한다 . 그래야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 .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고 ,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   내 영혼이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분을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하여야 한다 . “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롬 8:5), “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벧전 1:9)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세상은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다 . 그 시대의 유행을 따르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 그런데 새로운 유행을 따르기 위해서는 과거의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 즉 이전과는 다른 새로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   성경의 말씀은 약속에 관한 것이다 . 그래서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이 된다 . 즉 옛 약속과 새 약속이다 . 그런데 약속의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 .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옛 약속과 새 약속으로 구분이 되는가 ?   약속이 구분이 되는 이유는 ,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방법이다 . 옛 약속은 모세를 통하여 약속을 하셨고 , 새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셨다 .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 모세를 통하여 약속하신 방법은 신랑이 신부의 손을 붙잡고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방식이고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약속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셔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천국으로 인도하겠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은 같지만 이루시는 방법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것이 훨씬 더 안전하고 구원의 은혜가 넘친다 .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다 .   우리는 새 것을 좋아하지만 옛 약속이 근거가 된다 .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다 . 과거의 것을 더욱 더 은혜롭게 안전하게 하기 위한 새 약속이다 .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을 삶 가운데에 ‘ 좌우명 ( 座右銘 )’ 이 있다 . 이 말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 자리 오른쪽에 놓인 명심할 내용 ’ 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잘 보이는 곳에 오래 머무는 곳에 자기 자신을 경계하는 문구를 써서 붙이곤 한다 .   가나안 땅에 정착한 자들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도 지켜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 하나님이 명령하신 계명이다 .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미간과 손목에 기호로 삼아 지키게 한 것이다 .   부모는 자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강론을 하여야 하였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약속한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즉 자손이 번성을 하고 ,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풍성하고 , 소나 양이 번식을 하고 , 전염병과 질병에 걸려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   사도요한 서신서에서 “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요일 2:4) 라고 하였다 . 즉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요 , 거짓말하는 자임을 증언하고 있다 . 더 나아가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 자라고 한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라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지키는 자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 주여 주여 ’ 외치는 자는 많은데 ,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찾기 힘들다 .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잘 보이는 곳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새기어야 한다 . 그래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고 , 하나님께 복 받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인간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그 속에는 삶이라는 것이 있다 . 오늘도 삶이라는 주제로 많은 변론이 일어나고 있다 .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 지난주에는 프랑스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 테러범들은 그들의 삶과 목적에 방향이 다른 사람들을 살인하였다 . 즉 나와 삶의 방향과 목적이 다르다면 죽어야 마땅하다는 논리가 작용한 것이다 .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말씀을 하셨다 . 말씀하셨다는 것은 듣고 , 깨닫고 , 판단할 수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배경인 구약에서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한다 .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마음대로 빼앗아도 괜찮은 때였다 . 재물과 가축들로 약탈하고 심지어는 사람들도 노예로 삼을 수 있었다 . 그러니 도덕질 , 살인 , 간음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 즉 죄로 타락한 사람들의 본성이 그대로 들어난 것이다 .   하나님은 죄로 타락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 . 즉 참인간을 보내신 것이다 . 그리하여 인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신 것이다 .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의 모습을 깨닫게 하셨다 .   성경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다 . 즉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고 , 예수 그리스도처럼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참 아들이 되는 것이다 ( 마 3:1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자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복을 주셨다 .   하늘 아버지가 그의 아들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 이웃을 미워하지 말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 그 말씀에 순종을 하면 전쟁이나 폭력이나 테러는 일어나지 않게 된다 .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누룩은 효소작용에 의해서 발효를 한다 . 그리고 발효는 변질시키고 썩히는 작용을 한다 . 본래의 것을 변하게 하고 부패하게 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성경에서 누룩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부패와 타락의 상징이 된다 .   우리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 막 8:15) 하셨다 . 또한 천국의 비유 가운데도 누룩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   이뿐만 아니라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는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 고전 5:7) 말씀하셨는데 , 거짓사도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그들은 육체의 쾌락을 위한 음행의 타락에 빠지게 되었다 .   “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 갈 5:9)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는 구원을 받은 증거가 육체의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는 거짓사도의 속삭임에 복음의 본질을 외면하고 그들의 사도인 사도바울까지도 불신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시려 하는 것은 생명이다 .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한다 . 그것을 영생이다 . 영생을 얻고 영생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누룩이 섞인 다른 교훈을 받으면 아니 된다 .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만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 요 6:51). 누룩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생명의 떡은 주님의 살 ,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뿐이다 .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룩이 섞이지 않은 떡을 싫어한다 . 오히려 누룩이 섞인 떡 , 변질된 다른 교훈을 더 좋아한다 . 사람을 자랑하고 돈을 좋아하고 자랑한다 .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날 수 없게 되었다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그분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야 한다 . 즉 율법을 지켜야 한다 . 그래야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가 교제로 이어지고 , 약속의 땅에서 장구할 것이고 , 크게 번성케 하는 약속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맛으로 비유하였다 . 갓씨와 같은 맛이요 , 무교병이요 , 쓴 나물과 같다고 하였고 , 주님은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 요 6:48) 하셨다 . 생명의 떡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약속이다 .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무교병과 같은 맛이요 , 쓴 나물과 같은 맛이다 . 무교병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이다 . 무교병의 맛을 아는 자는 생명의 가치를 아는 자이다 . 입에는 쓰나 생명을 보존케 하는 것이다 .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때에 먹었던 음식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 입에는 달콤하고 자극적인 맛이다 .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음을 당하였다 .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였다 .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는 십자가의 복음을 먹어야 한다 . 맛이 없고 인기가 없다고 해서 누룩을 섞으면 안 된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 고전 5:7) 하셨다 .   오늘도 우리는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한다 .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에는 죄사함이 있고 ,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   nybabo.blogspot.com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I

  우리 속담에 ‘ 등 따시고 배부르면 딴 생각한다 ‘ 라는 말이 있다 . 즉 먹고 살만하니 엉뚱한 짓 한다는 것이다 . 요즘 대한민국이나 이웃나라나 먹고 살만하니 과거의 역사 세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 소위 진실이라는 명분을 걸고 각 자의 입장을 소리내고 있다 .   나라의 역사관은 국민들의 삶의 가치와 숭고성을 나타내며 또한 미래를 향한 방향성을 제시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디에다 가치를 두고 사람답게 살았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 즉 사람답게 살았었고 , 앞으로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   진리는 상대진리와 절대진리로 나누어 생각을 하여야 한다 . 인간의 이성으로 만든 진리들은 상대진리가 되고 ,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은 절대진리가 된다 .   그런데 세상은 사람의 생각이 절대진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 그래서 자기 것만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 이미 오래전 옛날에 고대의 철학자 소피스트들이 ‘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 라고 주장을 하였다 .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하여 그들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   이 세상나라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졌다 . 그의 나라는 섬기고 낮은 자리에 있는 자가 큰 자라고 한다 . 주님은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셨다 . 그런데 섬지는 자 ( 디아코노스 ) 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은 의미가 있다 .   주님이 말씀하시는 섬기는 자란 , 신하가 왕을 섬기는 자세이다 . 주님은 몸소 제자들에게 낮은 자의 섬기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다양한 모습으로 본을 보여 주셨다 . 그래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만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는 주님의 제자들이 모인 교회이다 .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에 사람의 생각을 주장할 수 없는 곳이다 .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과 숭고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인생의 삶의 주제는 생명을 연명하는 것이다 . 그러기에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를 고민하여야 하고 , 그런 다음에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   우리들은 이러한 문제에 의식이 없는 듯하지만 , 그러나 무의식속에 너무나 친숙한 것들이다 . 이것들에 대하여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요즘 TV 에 등장하는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다 .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고민인데 소위 먹방 ( 먹는 방송 ) 이라 하는 것이다 .   몸에 좋은 것이 무엇이며 , 어떻게 요리하여야 맛있게 먹을 수 있는가를 소개하고 있다 . 그리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채우면 , 그다음에는 어떻게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하는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   성경 속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있다 . 사람이 무엇을 먹어야 하며 ,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는 책이다 . 인간들이 간절히 소원하는 영원한 행복과 기쁨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 그것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하고 , 영원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을 전하고 있다 . 인간들이 이 땅에 살면서 대대로 이어져오는 커다란 고민이다 . 각 시대마다 현학자들이 지혜를 주장하였지만 한 시대의 풍류가 되고 만 것이다 .   교회가 자랑하고 주장하는 것이 사랑이다 .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을 받는 사람보다 내가 더 행복하다 . 나의 감정적인 요소로 만든 사랑으로도 남을 사랑하고 내가 기뻐할 수 있다 .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랑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사랑이다 .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 영생이다 . 즉 영원한 생명이다 . 그리고 그의 아들을 통하여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증거하셨다 . 사랑하는 아들이 죄인들에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자 능력을 나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감기 ‘ 란 놈이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와 온몸 구석구석을 나흘 동안이나 지마음대로 훌트고 다녔다 .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고 , 진통제와 감기약을 먹었지만 신통한 효과는 없었다 .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   감기는 인간이 가장 걸리기 쉬운 질병이라 한다 . 감기 바이러스가 무려 200 종이나 된다고 한다 . 호흡기 쪽에 감염이 되어 전염이 된다고 한다 . 그 질병의 근원을 치료할 수 없다고 한다 . 그래서 감기를 직접 치료해 줄 수 있는 약은 아직 없다고 한다 .   시중에서 파는 감기약에 대하여 정확히 말하자면 감기를 치료하는 약이 아니라 , 감기와 동반된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약이다 . 콧물을 멈추게 한다든지 , 열을 내리게 한다든지 , 기침을 멈추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약들이다 .   그래서 현대의학에서도 감기의 궁극적인 치료는 인간의 면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평상시에 비타민을 잘 챙겨먹고 , 몸을 차겁게 하지 말며 ,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라 하며 , 가장 중요한 것은 감기환자와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   육체에 가장 흔한 질병이 감기라면 , 정신질환 중에서도 감기증상과 같은 우울증도 있다 . 정신적인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타나는 정신질환의 감기이다 . 증상이 의욕감퇴이며 피곤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 육체의 질환은 잘 먹고 쉬면된다고 하지만 , 정신적인 면에서는 스스로 해결을 할 수 없다 .   성경 속에 등장하는 시편기자는 이 문제에 직면하였다 .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시 42:5)   시편기자는 자기의 영혼에게 스스로 질문을 하고 있다 . 왜 우울해하고 낙심하고 있는가 ?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지혜로움을 밝힌다 . 이것은 마치 환자가 의사를 찾아가는 이치와 같다 . 환자는 의사에게 몸의 아픈 증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