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어제는 켈리포니아주에 있는 Carmel Beach를 다녀왔다. 그곳에서 다람쥐를 보았다. 모래 숲에서 살고 있는 다람쥐인데 어린아이들이 던져 주는 빵조각에 경계심을 풀고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것도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왔다.
자연에서 야생으로 살아야할 다람쥐가 모래밭 숲속에서 살고 있다. 그곳에는 다람쥐가 좋아하는 도토리나 열매가 없는 곳이다. 다람쥐가 먹는 것은 빵부스러기이다. 야생 다람쥐의 모양은 갖고 있었으나 근성은 잃어버린 것이다.
Carmel Beach는 관광지이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사람들의 발길이 많다가 보니 일어난 일이다. 다람쥐는 도토리나 각종 열매를 먹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빵을 받아먹기 시작을 한 것이다. 이 모습을 보면서 신자들의 삶에 대하여 생각을 하였다.
성경 말씀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음을 책망하고 있다. 외모로는 신자로서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직분의 호칭도 있고, 정장 양복에 성경책도 손에 쥐고 있거나 차 안에 유리창 앞에 놓여 있고, 예배도 참석하고 있다.
그런데 신자로서의 근성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신자는 무엇으로 살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를 모른다. 신자가 먹어야할 영적인 음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먹는 것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다. 다람쥐의 먹이는 사람이 주는 빵조각이 아니다. 다람쥐가, 다람쥐가 되기 위해서는 도토리를 먹어야 한다.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그들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를 위함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 아들에는 맏아들과 탕자와 같은 두 부류가 있다. 맏아들처럼 아버지의 일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그러면 아버지의 것이 맏아들의 것이 된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탕자처럼 기도를 하고 있다. 건강과 돈을 주시면 멀리 떠나서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욕심의 기도를 아뢴다. 아버지 앞이 아니고 아버지를 떠난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은혜로 세상 사람들과 세상에서 잘 살겠다는 허망한 욕심이다.
신자의 경건은 세상 사람들 속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돈이 주는 즐거움보다는 하나님의 경건을 행하는 기쁨으로 살아야 한다. 다람쥐가 빵을 먹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된다. 다람쥐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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