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믿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하려 한다. 물 위를 걸어오시던 예수님을 보았던 베드로가 있다. 그는 주님이 오라 명하시면 물위를 걸어가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하며 나무라셨다. 그렇다면 믿음은 물위를 걷는 데만 쓰는 것인가?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있지만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있다. 기독교의 신앙의 가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므로 인하여 나타나는 반응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세상 사람은 자기를 중심으로 산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과 수고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시듯 주시는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의 크기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이유는 우리를 죄에서 꺼내기 위함이다. 즉 죄 속에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가시면서 이 길은 하늘 아버지가 원하시는 길이라 하였다. 또한 이 일이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자신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기쁘게 하고 선을 베풀며 유익을 전하는 자이다.

이와 같은 사랑을 잘 실행하는 자를 믿음이 좋은 자라고 한다. 모세나 바울의 믿음이나 신앙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데로 모범적이었던 사람들이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민족이 우상을 만들고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춤을 추는 행위를 하여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백성을 다 죽이고 모세를 통하여 다시 시작을 하시겠다고 하였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청을 한다. 하나님께서 펴신 팔과 큰 손으로 건진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죽으면 이방나라에게 웃음거리가 되니 용서하여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일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여 주시지 않으면 나도 하나님의 책에 있는 이름에서 지워달라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기는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하였다.

이것이 믿음 큰 자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이웃에게 나타내는 모습니다. 믿음이 큰 자는 믿음이 적은 자의 부족함을 담당하는 것이다. 즉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공급받게 하여야 한다.

우리의 감정을 전하거나 동정어린 사랑은 값없는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 앞으로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고 용서의 자리로 나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려 하신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모습을 나타내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자리로 오신 것은 섬기러 오셨다. 죄인을 위한 자리로 오신 것이다.

죄인이 있는 자리, 섬김이 있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이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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