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만일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배신하고 나를 이유 없이 또는 근거 없는 거짓말로 인신을 공격한다면 억울함과 분함이 극에 달한다. 성경 속에서 인물가운데 이와 같은 어려움을 당하여 지은 시가 있다. 그래서 이러한 시를 저주의 시라고 한다. 저주의 시를 살펴보면 그 내용을 과연 성경에 기록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긴다. 그런데 그 시를 다윗이 썼다는 것이다.

다윗은 얼울함을 당하고 있지만 악인을 직접 찾아가서 분을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분함과 악인이 어떻게 저주를 받았으면 하는 내용을 간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를 거짓으로 증거를 한다면 당장에 그 사람을 찾아내고 물리적인 공격이나 말로 분함을 퍼 부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보여준 올바른 신앙은 악인의 심판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호소하고 있다.

또한 악인을 향한 저주의 내용도 이미 신명기에서 불순종하는 자들을 향한 저주의 약속을 근거한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작정하시고 계시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믿고 있기에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한 것들을 성실히 실행하시고 계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의인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놀라는 것이 아니라, 악인에게 향한 약속도 신실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인들은 더욱 놀라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순종의 축복의 약속으로 알고 기억하고 있지만 불순종의 저주의 약속이 더 많은 분량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불순종의 내용으로 인하여 생긴 결과이다. 그런데 신명기 28장의 저주의 내용이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가는데 그대로 이루어 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약속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다윗이 저주의 시를 쓸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저주의 약속이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다윗의 계속되는 시를 보면 자신 역시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택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를 한다. 늘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그리고 내게 임하는 은혜를 악인들이 보게 해 달라는 것이다. 악인들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어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들의 분함을 토로하는데 있어서도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저주를 좋아하는 자에게 즉 악인이 좋아하는 저주로 복을 주라는 원리가 되는 것이다. 의인의 기도는 용서와 자비와 긍휼의 기도이다. 의인이 좋아하는 것으로 되돌려 주면 하나님의 더 크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보복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이웃이 무엇이라고 비방을 해도 하나님 앞에 나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손으로 해결하여 달라는 믿음이다. 우리가 세상의 이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원리를 안다면 기도를 아니 할 수가 있는가?

"그가 저주하시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니"(시 109:17)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