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그리스도인이 신앙고백으로 하는 사도신경이 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다가 보면 거슬리는 인물이 등장을 한다. 그의 이름은 빌라도이다. 그런데 성경의 말씀을 읽다가 보면 빌라도가 자기는 그의 피에 대하여 죄가 없다고 하면서 대야에 손을 씻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빌라도는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참으로 웃기는 소리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의 정치적인 상황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을 하였지만 사형을 집행할 판결은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판결은 로마에게 있었다. 그래서 빌라도의 법정을 빌린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죄항목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고 백성들을 선동하여 로마 정권에 대항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로마의 황제에게 항거하는 것으로 분위기를 몰아갔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와 같은 협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 주려 하였지만 유대인들의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빌라도는 백성들이 민심의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가 없지만 사형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유대 총독의 자리를 계속지키기 위함이었다. 그 판결로 인하여 그의 이름은 영원히 잊지 못할 악인으로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 이 때에도 빌라도의 심정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즉 먹고 살기 위해서 불의와 타협을 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즉 권모술수를 쓴다. 이것은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꾀하는 모략이나 수단이라 한다. 세상은 이렇게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출세를 한다고 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 아니다. 허망한 것과 허영된 것을 추구하는 곳이다. 그러니 진리를 지키거나 보존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다.

만일 빌라도가 양심을 따라 판결을 하였다면 악인으로 전해져 내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간 권력의 욕심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지 못함으로 인하여 양심을 팔았다. 이 한순간으로 인하여 그의 이름은 영원토록 악인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일이 국가의 역사나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믿음이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이런 순간을 맞이할 때에 진리의 편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판단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개인의 삶 속에서도 양심에 따라 살거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정의를 따라 살고 싶은데 조폭의 주먹이 무서워 적당히 사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유익이나 편리함으로 인하여 적당히 눈을 감아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만일 적당히 한 것이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판결 하나가 후손의 입에서 원망이 떠나지 않는다.

빌라도는 잘못된 판결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모든 자들의 대표가 된 것이다. 신자들도 대소사의 일을 결정할 때에 주변의 사람들이나 후손들에게 불평과 원망을 듣는 일이 없게 생각하며 판단과 결정을 하여야 한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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