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한 동안 언론 지상에 ‘슈퍼 갑‘이라는 단어가 유행을 했었다. 계약문서를 작성할 때에 ’갑’이 제시 하는 조건에 ‘을‘을 따라야 하는 것이 관례이었다. 그런데 ’을‘이 ’갑‘이 제시하는 조건에 따를 수 없다고 하여 대항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변하여 ’갑’이 ‘을’의 요구 조건을 들어 주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을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이다. 이것은 변할 수가 없다. 교회 안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을’의 관계를 갖고 모여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속에서도 ‘갑’과 ‘을’의 관계가 성립이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경 말씀 가운데 죄를 범한 자를 용서하는 문제가 나온다. 처음에는 죄를 범한 사람과 일대 일로 만나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두세 사람을 데리고 가고, 그래도 듣지 아니하면 교회 앞에 알리어 교회가 묻고, 그래도 회개치 않으면 출교를 시키라는 것이다.
범죄한 자에게 세 번의 기회를 준다. 이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된다. 비록 죄를 범하였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안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갑’의 위치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범죄를 하면 나는 ‘갑’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잘못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죄의 무서움과 결과가 무엇인지를 관찰하라는 것이다. 또한 범죄한 자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어 함께 아파해야 한다. 이것이 형제 사랑이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안다면 ‘갑’의 위치에 설 수 없다. 내가 죄사함을 받은 가치는 금 일만 달란트이다. 그러나 형제의 잘못은 백 데나리온이다.
하나님의 명령 속에 범죄한 자가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받는 자는 반드시 용서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를 해 주는데 인색하다. 가능 한한 오래 질질 끌다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싶으면 그때서 용서를 받아 준다.
그러다가 망한 자가 금 일만 달란트 탕감 받고 옥에서 출소한 자이다. 그는 백 데나리온을 빌려간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다. 용서를 간청하는 친구를 감옥으로 보냈다. 용서를 구하는 친구를 용서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그는 금 일만 달란트를 받은 탕감이 취소되고 다시 감옥으로 갔다.
그리스도인은 용서의 문제에 있어서 누구도 “갑‘이 될 수 없고 ’슈퍼 을‘이 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인들이 있는 자리까지 내려 오셨다. 이 은혜를 알고 있다면 누구도 교만한 자리에 앉을 수가 없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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