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피흘리시고 세운 교회에는 지켜야할 것들이 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서 거룩함이 유지되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켜야할 법규가 있다. 그래야 세상과 다른 공동체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 안에는 사랑과 은혜만을 강조하다가 보니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이다. 그러다보니 이건 하나의 친목 단체보다도 질서가 없다.
평화스러운 분위기에서는 모든 것이 용납이 되다가 극한 감정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이 되면 그 때부터는 법과 원칙을 따지기 시작하는 곳이 오늘날 교회이다. 그리고는 과거의 모든 일들을 되새김질을 하는 초식동물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문제는 세상의 법정에서도 다루기를 힘들어 한다. 즉 세상의 상식으로도 막혀 있고, 교회가 속하여 있는 교단의 헌법으로도 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문제는 얽히고설킨 실타래와 같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교회 안에서 정의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할 도리가 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사랑과 용서라는 명분으로 그냥 그렇게 넘어 간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난리 난리에 생난리를 친다. 아니 어떻게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울분을 토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먼저 지켜야 할 것이 '예의'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여러 가지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예로써 나타내는 존경의 뜻' '존경의 뜻을 표하여 예로써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의라는 것의 뜻을 살펴보면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이다. 내 앞에 다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존경의 반대되는 뜻은 '무시나 멸시'라고 할 수 있다. 즉 '막 대우 한다'는 것은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이 피흘리시고 세운 교회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사랑이 있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싸움은 정의가 실종된 상태에서 일어난 일들이 감정으로 폭발을 하여 문제가 된다. 평상시에도 '나를 무시했었다'든지, '내 의견을 묵살 했다'든지 이러한 감정의 싸움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급한 인격을 연마하여야 한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할 때는 잘 경청을 하여야 하고, 이웃을 만나러 갈 때는 깨끗하고 격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도 모임이나 행사장에 갈 때에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예의'이다. 그래서 그들이 정하여 놓은 '드레스 코드'가 있다. 그리고 식당에서 식사할 때에 칼이나 나이프를 높이 들거나 휘두르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예의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정하여 놓은 약속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이 지켜야할 예의가 있다. 교회 안에서 다른 형제의 아내에게 '자기'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자들이 있고,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 자매들만 보면 손을 잡으려 하고 또 허그(Hug)을 하려는 행위는 자매들의 남편들을 무시하는 마음에서 행하는 저질스러운 행동이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도리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의심받을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속담에도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 하였다. 교회 안에서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 이것을 무시하다가 보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하나가 교역자들의 간음 사건이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라 할지라도 성인 남녀가 한 방에서 함께 있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와 정의가 시행되는 가운데에 있어야 한다. 이것을 분간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기독교가 윤리 도덕을 잘 지키는 '개인의 사교'만도 못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와 정의가 지켜지기 위한 것이다. 공의와 정의가 없는 상태에서 행하여지는 사랑은 곧 무질서로 이어지게 된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다"(렘 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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