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이 땅 위에 있는 교회들은 천국의 모형을 가지고 있지만 불완전한 교회라고 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분쟁이 있을 수 있다. 즉 불완전하기에 싸움이나 분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분쟁이 있을 시에는 그 문제의 해결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질서는 믿음이 큰 자가 작은 자의 부족함을 담당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모여 있지만  믿음의 분량은 각기 다르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도를 많이 알고 있는 것이다. 즉 주님의 가르침을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 안에서 만일 싸움이 일어난다면 믿음이 큰 자에게 먼저 책임을 묻는 것이 순서이다. 평상시에는 믿음이 큰 자로 자처하기를 좋아하지만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나면 자연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믿음은 찾아 볼 수도 없는 것이 교회 안에서의 모습이다.

세상에서는 잘못한 자나 나이가 적은 자가 먼저 잘못을 사과한다. 그러나 교회는 이 방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큰 자가 먼저 나아가 사과를 하는 것이다. 즉 제단에 제물을 놓고 제사를 드리려 하다가 형제에게 사과할 일이 있으면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목한 후에 제단에 돌아와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다. 믿음이 크고 좋다는 것은 이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 안에는 상식의 수준을 넘어서 고급한 인격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주님이 보여주신 순종의 모습이다. 이러한 고급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 신자들이 중직을 맡은 직분자들이다. 중직자들은 이러한 분쟁 가운데서도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현실의 모습은 전혀 아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보다 더 비인격적이다.

세상 사람이 바라보는 교회는 신비로움이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세상사람 눈에 비상식적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전도의 문을 막는 것이다.

각 자의 마음 안에 있는 자존심이 상하여 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존심을 상한 일이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당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가 만든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하나님이 아니라고 조롱을 당하셨다. 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셔야 했는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고통의 아픔을 진정으로 안다면 교인들끼리 자존심 세우는 싸움을 할 수 있을까 하며 의문이 든다.

오늘도 교회 안에서 싸우고 있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좇고 있는지를. . . . . .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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