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동업자의 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같은 업종에 있으면서 서로를 보호하려는 최소한의 의리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신이 없으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스포츠 경기에서 야구가 있다. 야구에서는 빈볼이라는 것이 있는데 투수가 타자의 머리를 향하여 빠른 볼을 던지는 것이다. 물론 타자를 겁을 주기 위하여 하지만 타자가 피하지 못할 경우에는 머리가 부러질 정도의 부상을 입기 때문이다. 타격에 능한 선수라도 몸으로 가까이 오는 볼은 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볼을 실력이 있어야 한다. 만일 실력이 없으면 몸에 맞는 볼을 던지게 됨으로 실점을 허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교회는 분명하고 정확한 이유로 인한 모임이다. 한 분의 하나님을 믿고 같은 주를 섬기고 성령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내용과 목적이 다르다면 곤란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이웃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즉 상대를 위한다 하여 치명적인 약점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기도를 요청하는 행위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투수가 볼을 잘 다루어 실력을 갖추어서 던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면 천사가 말하는 것 같더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죽음 통하여 나타난 것일까? 죄인인 우리가 스스로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법을 지킬 수 없고 죄문제를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법이나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조건 없이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다. 같은 뜻을 함께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
 
야구에서는 빈볼이나 위협구를 던지는 것이 허용이 되지만 그러나 교회에서는 아니다. 오히려 불쌍한 자에게 자비나 긍휼을 주는 곳이다.
 
세상에서 동업자들이 모여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물며 교회에서 동업자의 의식이 실종한다면 그것은 마치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은 것이다. 소금과 같은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대로 행하는 자를 말한다.
 
신앙과 믿음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이다. 마지막 때를 맞이하여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걱정이다. 이방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가게 하였지만 정작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영광에 참여하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여 날마다 자기의 몸을 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파란 가을 하늘에 바다를 먹물로 삼아서 써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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