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는 물질이 힘을 가지고 있는 시대에 살다가 보니 자연히 물질을 구하기 위하여 더 좋은 방법과 수단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왕이면 묘하고 신통하고 힘이 강한 신을 찾아 섬겼다. 왜냐하면 물질이 나의 자존심을 세워주며 나의 인격을 대변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돈이 최고라는 한다. 물질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곧 현대인들의 사상과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이와 같은 가치를 기독교를 통하여 얻으려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성경말씀을 읽어도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말씀 가운데에는 물질을 구하며 응답을 받았다고 감사의 찬양의 시를 기록한 곳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질을 구하는 자는 시편을 보아도 찡하게 감동이 오지를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하여, 사랑과 자비와 인자하심에 대하여, 이미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죄악 가운데에서도 나를 지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지키시는 하나님,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깨닫는 과정을 말하며, 깨달은 후에는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관심은 교회 안에서도 금 덩어리로 변하는 것에 관심이 있고, 병 고치는 일에 따라다니는 열심이 있고, 나의 평안과 가정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생각을 한 나머지, 결국 하나님은 나를 지키시는 수호신이 되었고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달려오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우리의 찬양은 우리가 죄에 죽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을 하여 주신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게 하여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종교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며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종교가 되는 것이다.
마치 경쟁적으로 출발선을 출발하여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는 자만이 귀한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경쟁적이지 않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난과 환난을 통하여 알게 되어서 그의 후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였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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