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Edmund P. Clowney는 그의 저서 설교와 성경 신학이란 책에서 설교에 대하여 정의하였다. 그는 설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이면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뜻과 계획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설교는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시는 일을 선포하면 된다.
 
요즘 설교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말이 참 많다. 재미있어야 한다. 감동적이어야 한다.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은 설교 세미나를 통하여 강사마다 외치며 주장을 한다. 그러다보니 듣는 신자들의 입장에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헷갈린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날에 설교를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3,000명이 회개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런 반면에 스데반 집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설교를 하였다.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찔림을 받았지만 분노하여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다. 이번에는 우리 주님이 설교를 하셨다. 고라신과 벳세다에서 이적을 행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셨다. 그런데 회개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어찌된 일인가? 우리 주님의 설교가 베드로만 못하단 말인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역대 설교학자들에 의하면 아주 훌륭한 설교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설교자가 문제인가, 아니면 듣는 자들이 문제인가를 살피려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씨앗이 땅에 떨어지지만 어떤 밭에 떨어지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옥토에 심기었을 때는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나 길가에 떨어지거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지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 좋은 마음의 밭이 되어야 한다. 좋은 마음이 된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에 있는 굳은 것들을 제거하시고 부드럽게 해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재하시면 그와 같이 변하게 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된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심으로 인하여 변화된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하게 하신 것이다. 성령이 임하는 자들은 감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회개와 돌이킴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매가 맺히면 감출 수가 없다. 마치 사과나무가 열매를 당연히 맺음과 같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 자들은 주님의 설교를 들어도 변화되지 않는다. 성령이 임한 자와 임하지 않은 자와의 차이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니 이제 설교자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구하여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을 증거하여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로 하여야 할 일이다. 먼저 마음의 밭을 성령께서 일구셔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다려야 한다. 이와 같은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다 궤변이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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