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자아”란 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나의 생각, 의지,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자아”가 형성됨으로 인하여 삶의 방향과 목적을 결정짓게 되고 자신의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데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아”를 형성하기 위하여 학문과 교양에 대한 배움을 갖는다.
사람들이 고집을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 “자아”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제 “자아”는 교만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서로 미워하고 비방하고 가증스러운 자가 되는 것이다. 세상이란 곳은 이런 “자아”가 같은 자들이 함께 모여 정당을 만들고 동아리를 만든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는가를 생각하면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 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크게 의지하는 자들이 많다. 즉 자신의 지혜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자아”가 그리스도의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 믿음의 생활은 구원받기 이전의 “자아”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하지만 자신의 “자아”를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부패된 성품으로 진리를 변질시키려는 미련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부패된 성품이 바뀌기 위해서는 중생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성령의 거듭남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련한 자들은 이런 과정을 자기의 자아로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성령의 거듭남의 역사가 있다면 하나님과 영적인 연합이 있음으로 선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은 함께 싫어하는 자가 된다.
당신의 “자아”가 이렇게 변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중생하지 못한 마귀의 소유가 된다. 마귀의 소유인 자들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라고 하였다.
즉 “자아“가 하나님의 선을 모르는 악한 성품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됨을 긍휼로 얻게 되었다.
이제 새롭게 된 자가 됨으로 인하여 이전의 것은 버려야 한다. 즉 마귀의 자식으로 있었을 때의 것들을 말한다. 그런데 마귀의 자식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며 서로 인정하는 곳이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회이다.
교회는 죄인들을 새롭게 만드신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워 이전의 “자아”를 버리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앉게 하시는 것을 배우고 훈련하는 곳이다. 아직도 교회에서 자신의 “자아”를 주장하는 자들은 마귀의 자식들이 아닌지 스스로 살펴야 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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