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싸움이라는 것은 폭력성을 갖고 있어서 끝의 결과는 상처와 피 멍이 드는 것이어서 싸움이 시작되면 말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싸움을 권장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싸움이다. 그런데 이 영적인 싸움은 내 안에서 진리와 거짓과의 싸움이다. 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한 자만이 이웃과의 대인관계에서 관용과 사랑과 용서를 할 수 있게 된다.

이 영적인 전쟁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은 먼저 진리를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거짓이 교묘하게 방해하며 유혹을 한다. 마귀의 공중권세의 힘은 파멸의 길, 죽음의 길로 몰고 가는데 있다. 즉 파멸의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켜야 한다.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 진리를 만들 수 있거나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래서 사람은 진리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요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다. 가지인 우리가 줄기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원리이다. 즉 열매의 내용물은 줄기를 통하여 공급받은 수액과 생명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은 열매는 줄기로부터 얼마나 많은 수액과 생명을 공급받느냐의 싸움이 된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는 포도열매끼리의 싸움이 되고만 것이다. 내 포도열매의 크기가 이러한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의 싸움이 교회 안에서와 기독교인이 모인 곳이라면 어김없이 난다. 기독교인들끼리 싸움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이와 같다. 열매에 대해서는 나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수고하거나 노력해서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니라, 그저 가지인 내가 줄기에 붙어만 있었더니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자랑은 자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을 하여야 한다.

또한 기독교인은 영적싸움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심한 욕설과 인신공격을 하더라도 분을 발하거나 그에 대응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만일 분을 발하면 하루의 해가 지기 전에 삭이고 보복의 저주나 살인의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의 영적인 싸움의 특성이나 내용을 보면 이웃과의 싸움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세상은 시기와 질투와 경쟁이 심한 곳이라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속이 뒤집히는 때가 있다. 그런데 훌륭한 기독교인 이라면 이러한 것들에 반응을 하지만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런 것 인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특성도 알고 마귀의 속임수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력이 있기 위해서는 하루하루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존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온갖 종류의 질고와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가 죽어서 썩어질 자리로 가셔서 나 대신 죽었고 썩으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육신의 사건을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내의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의존하여야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사람으로서 그와 같은 자리에서 승리를 하셨기 때문이다. 결국은 승리하신 자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고통의 자리, 수치의 자리, 굴욕의 자리에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과 수치와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에까지 가셨더니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부활의 권세를 주셨다는 것이다. 실패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진정한 승리였다. 하나님은 죽음의 권세를 죽음으로 인하여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이웃과의 싸움에서 인내하며 참는 자가 결국은 승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와 교회 안에서의 싸움은 '내가 알고 있는 기독교는 이런 것이라' 하며 자랑하며 똑똑함의 싸움이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는 자기의 자랑과 잘남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싸움이 있다면 온갖 욕설과 음해가 있더라도 끝까지 참고 대응하지 말고 끝까지 참으면 이겨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는 다른 사람 사람들의 문제를 말하는 곳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와 문제를 아뢰고 해결 받는 곳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죄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죄나 잘못을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나 실력이 없다.

오늘도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남을 가르치려 정죄하려 하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인내하며 동행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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