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이민교회에 있는 청소년,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더 일찍 떠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가정과 교회에 교육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좋은 청소년 지도자를 찾으면 된다고 하여 아우성을 쳤으나 문제의 답에 대한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다.
먼저 우리의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침은 세상의 힘을 키워한다고 하는 것이다. 시험기간이 오면 주일 예배도 빠질 수 있다고 한다. 즉 세상은 하나님의 힘이 아닌, 좋은 대학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세상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교회에 가도 된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또 교회에서도 교인들 간에 싸움이 시작이 되면 끝장을 보는데, 그곳이 세상의 법정에서의 판결을 따른다. 교인들이 싸우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나 경찰이 오면 순하게 응한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이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
결국 서로의 의견이 대립이 되어 세상의 법정으로 가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시지도 못하고 개입하실 수도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현재 이민교회에 있는 1세대들은 이러한 모습을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우리의 부모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을 과연 그들이 두려워할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들이 보여준 모습은 경찰을 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고도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청소년, 청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찾거나 계발을 하려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하여야 할 일이 1세대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회개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식들에게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땅의 토속신인 바알을 섬기고 이방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그들의 가정에서의 교육과 교회교육이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는 민족의 지도자 없어서 하나님께서 천하고 낮은 자를 쓰셨던 것을 사사기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기독교의 교육은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과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의 실패는 지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부모님들을 통하여 전할 수 있는 것이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삶이다. 이것을 망각한 민족들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 . . ”(신 6:6-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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