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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그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자손을 모두 멸절하였으나”(왕하 11:1)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그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자손을 모두 멸절하였으나”(왕하 11:1)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남 유다는 다윗의 길을 따랐고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길을 갔다. 여로보암의 길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우상숭배의 길을 간 것이다. 그런데 남 유다왕과 북 이스라엘 왕과 서로 화친을 하며 지낸 적이 있다. 남 유다의 왕인 여호람이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인 아합의 딸과 결혼을 한다. 그래서 아하시야 왕을 낳는다.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그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자손을 모두 멸절하였으나”(왕하 11:1) 그런데 예후에게 살해를 당한다. 그러면 아하시야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달랴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손자들을 살해한다. “요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게 한지라”(왕하 11:2) 아합의 딸인 아달랴는 악한 자의 피를 이어받는 자로서 여호와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는 것이다.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할 메시야가 와야 한다. 손자들을 다 죽인다고 함은 유다의 족보를 끊겠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막을 자가 없다. 손자 가운데 요아스를 여호세바가 숨겨 육년 동안을 지내게 한다. “요아스가 그와 함께 여호와의 성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왕하 11:3) 칠 년이 지난 후에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왕위에 오르게 함으로 유다의 왕의 족보는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아달랴는 백성들의 칼에 죽었다. ”온 백성이 즐거워하고 온 성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왕궁에서 칼로 죽였더라“(왕하 11: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악한 마귀가 막을 수 없습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전파와 거룩...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겼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에게는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세상의 힘과 권력 그리고 돈이 주인이었다. 순종이란 주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고백이다. 즉 그분이 나에게 명령할 권리가 있고, 나는 따라야 하는 의무를 행한다는 것이다. 순종에는 두 가지가 있다. 노예 행위의 순종으로 형벌이 두려워 하는 것과 주인을 인격적으로 존경을 하여 자발적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에게 순종할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하나님인가 아니면 세상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세상의 특징은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등을 돌린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믿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세상의 영은 마귀이다. 그리스도의 영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 세상은 인간 사회에서 작용하고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반영하고 자기의 성향대로 인간의 틀을 만든 곳이다. 육적인 사고방식은 타락과 죽음의 방식이다. 그래서 죽음을 답보로 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을 시위하는 사람들을 동하여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단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세상의 삶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며 사는 곳이다. 또한 세상의 삶을 살면서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을 수 없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그렇다면 세상을 이길 힘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지키는 것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마 27: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마 27:11)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 서신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천 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빌라도라는 인물을 깊이 경계하여야 하기에 사도신경 속에서도 등장한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는 빌라도의 처형 허락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제 빌라도라는 사람을 살펴야 한다. 이 사람은 세상을 사는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이라는 곳은 하나님이 없는 곳을 말한다. 빌라도는 왜 이와 같은 결정을 하였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죄인 것을 알고 있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눅 23:4) 또한 그의 아내도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진실보다는 사람의 소리를 두려워하였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마 27:23) 그리고 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사형 언도를 내렸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진리를 거짓으로 바꾼 자가 빌라도이다. 거짓으로 바꾼 것에 대해서는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하며 전가한다. 즉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진도도 거짓으로 바꾼 자가 빌라도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신앙 고백에서도 빌라도를 기억하는 것은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함이다.  자신의 총독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백성의 소리를 두려워하여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게 하는 처형을 내린 것이다. 신자들도 자신의 영광을 위하...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것은 할례와 율법을 가지고 있고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면 약속의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은 육체의 후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을 말한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약속을 하실 때에 너의 몸을 통하여 태어날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자손(후손)이라 하셨다는 것이다. “네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8) 그 후손을 통하여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그의 안에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 “그런즉 믿음으로 밀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7) 그리고 예수 안에 있게 되면 약속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이 은혜는 이방인들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것에 대하여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지방에 사는 이방인이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 7:4) 스데반은 유대인들 앞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설교...

“예후가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를 다 죽이고 또 그의 귀족들과 신뢰받는 자들과 제사장들을 죽이되 그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생존자를 남기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11)

  “예후가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를 다 죽이고 또 그의 귀족들과 신뢰받는 자들과 제사장들을 죽이되 그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생존자를 남기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11)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에게 내려질 재앙이 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즉 악인들의 자녀들에게도 죽음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악인의 씨를 제거하여 죄악이 전염병과 같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살인 죄를 범한 자를 사형에 처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범죄를 규제하고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롬 13:3) 아합 왕의 칠십 명의 아들이 죽임을 당한다. “편지가 그들에게 이르매 그들이 왕자 칠십 명을 붙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 이스르엘 예후에게로 보내니라”(왕하 10:7) 하나님의 심판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이다. 바알 신을 섬기던 자들은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다가 죽는다. 더 나아가 이방 신을 섬기는 자들의 최후는 이방 신을 섬기던 나라의 종이 되어 죽는다는 것이다. 왜 이방 신을 섬기는 것일까? 자신이 중심이 되어 판단을 하게 된다. 그래서 눈에 보여야 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형상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오직 말씀으로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그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약속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기 위하여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고 엘리사 때에 그대로 이루시는 것이다. “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

“거기에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의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그를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왕하 9:2)

  “거기에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의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그를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왕하 9:2)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론이다. 즉 세상의 역사를 어떻게 주관하시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말씀을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짐을 확인하므로 약속의 하나님이심을 믿게 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왕에게 기름을 부어 자리에 오르게 하는 장면이다. 왕은 세습을 한다. 그런데 예후를 세워서 아합의 왕조를 치라 하신다.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왕하 9:7) 이러한 계획이 엘리야 선지자 때에 말씀을 하셨고,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이루어진다.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왕하 9:1)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이 죽어 그녀의 피를 개가 핥게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을 넘어서 자기가 법을 만들어 선포하였던 교만이었다. 즉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있어서 왕의 이름으로 금식을 선포하고 돌로 쳐 죽인 것이다.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왕상 21:19)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심판과 죽음이 어떠한가를 소개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세벨은 창 밖으로 몸이 던져져 장기가 파열된다.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왕하 9:33) 즉 그녀의 장기를 개들이 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은 것은 두골과 발과 손이다.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손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왕하 9:35) 죽어서도...

“하사엘이 이르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기에 이런 큰일을 행하오리이까 하더라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더라”(왕하 8:13)

  “하사엘이 이르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기에 이런 큰일을 행하오리이까 하더라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더라”(왕하 8:13)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진노의 저주와 심판이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계속하여 선지자들을 보냈다. 저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함이었다. 여러 가지의 기적을 행하였고 이방의 선지자들과 누가 참 신인지를 대결도 하였고, 싸움으로도 이방 선지자들을 이겼다. 또 엘리야 선지자가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도 보여 주셨다. 식량이 없을 때에 아람 군대 사람들의 식량으로 굶주림을 면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저 백성들은 끝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회개도 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한 결과는 심판이다. 이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군대를 통하여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미 엘리야를 통하여 북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왕상 19:15) 즉 엘리사가 하사엘을 왕으로 세워서 북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여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후의 칼에 의하여 오므리 악한 왕조가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왕상 19:17)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는 엘리사가 죽일 것이라 하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을 받아 죽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방 신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칠천 명이나 있게 된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즉 칠천 명을 통하여 다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 가운데서 유다 지파에 남겨진 자들을 통하여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