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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구원의 확신이나 천국의 확신은 사람의 의지나 열정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을 알므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았음을 확신할 때에 생긴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구원을 받은 자들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나타나는 열매가 있다. 즉 열매를 통하여 그 나무를 알 듯이 그리스도인들로 열매로 나타내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았다고 해서 사람의 외모가 바뀌지는 않는다. 외모적으로 볼 때에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도인이나 차이가 없다. 그런데 그 차이를 구분하는 방식이 있다. 그것은 아주 적은 차이라 한다. 마치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중동지방의 양과 염소를 차이가 아주 적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로 마지막 때의 심판의 기준을 말씀하셨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이 저 세상 사람들과 섞여서 살 때에 외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적은 차이가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과 성품으로 열매를 맺는 것으로는 차이가 있다. 외모로는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같은 가방을 매고 있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사랑과 긍휼을 배푸는 자이라는 것이다. 또한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성품이 있다. 즉 거짓말이나 시기와 다툼과 살인하는 더러운 말을 하지 않고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오래 참음과 인내로 견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마 25:37) 마지막 심판 때에 모든 사람들이 나오는데 외모나 말로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판단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적은 일에 충성된 자라고 함은 이웃이 배고플 때에, 목마를 때에, 굶주리고 헐벗을 때에, 감옥에 있었을 때에 사랑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자칭 신자라 하여 모세에 자리에 앉아서 말로만 하는 자들은 염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 23:3)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자는 열매로 알 수 있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 7:17)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사랑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신자들은 저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 외모로 그리스도인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성령의 열매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채우고,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으로 이웃을 대하는 자세를 취하고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믿음을 지켜야 한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지막 날의 심판의 때에도 적은 일도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배고픈 자에게 한 끼의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고, 목마른 자에게 물 한 병 주는 것으로 상급과 저주가 나뉘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과 열매가 달리지 않은 것은 사과 나무가 아닙니다. 신자에게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은 바리새인들은 말만 잘하였지 행함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마 25:32)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가장 큰 심판이 있다. 그날에는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고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인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그 심판의 날까지 신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열 처녀 비유로 말씀하셨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 구분이 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항상 깨어 있고, 등과 기름을 준비하였다. 즉 믿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달란트 비유로 말씀하셨다. 주인이 종에게 명령한 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여 적은 일에 충성된 종이라 칭찬을 받았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자신의 생각으로 주인을 판단하고 순종하지 않았다. 그 결과 충성된 자에게는 더 많은 일을 맡게 되고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불순종한 자는 가지고 있던 것도 빼앗기고 어두운 데서 두려움에 떤다. 적은 일에 충성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양과 염소로 말씀하신다. 중동 지방에서 양과 염소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목자는 쉽게 구분한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마 25:32) 마지막 날의 심판은 양과 염소를 목자가 구분하듯이 개개인을 심판함을 말한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3) 즉 적은 일에 순종하였다는 것은 대단치 않은 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인들과 악인들은 외모로 볼 때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마치 양과 염소가 비슷하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을 하는데 외모로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은 일에 충성하였는...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롬 15: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롬 15:15)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경계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에 편지를 쓰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도 사람의 사상이 전달될 까봐 걱정을 하였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함으로 인하여 말과 행위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효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 바울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래서 함께 하시고 능력을 주신다. 즉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시는 것은 새로운 창조이다.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사도와 우리들을 쓰신다. 쓰임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부족하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함은 나의 부족함을 채워 주심을 말한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이며 우리들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우리가 혼자이지 않음을 말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증거가 에스더와 모드리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들은 사회적인 지위와 조건으로서 유대인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영생으로 거듭난 인생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먼저 하였던 일은 날마다 내려오는 만나를 나누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탁하시고 마지막 때의 상급이 이웃을 돌보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일에 우리들을 택하셨고, 우리들을 통하여 그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셔서 기쁨을 얻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고난을 받으면서도 기뻐하...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게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왕상 20:13)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게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왕상 20:13)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전쟁을 통하여 알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삿 3:1) 아람의 왕 벤하닷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고 북 이스라엘을 포위한다. 그리고 아합 왕에게 이르기를 네 은과 금은 다 자기의 것이라 말한다.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왕상 20:3) 그때에 여호와께서 한 선지자를 통하여 아합 왕에게 이르기를 아람의 왕 벤하닷을 이기게 하신다는 것이다.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게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왕상 20:13)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돌아와 회개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아합 왕은 회개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아람 군대가 두 번째 공격을 해 온다. 아람 군대는 여호와 하나님은 산의 신이므로 골짜기에서 하는 전쟁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고 하며 조롱을 한다. 그 조롱하는 아람의 군대를 이번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다. “그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왕상 20:28) 아합 왕은 아람의 왕인 벤하닷을 죽일 수 있었다. 벤하닷은 아합 왕에게 아부하기를 생명을 살려 달라고 용서를 구하자 살려 준다.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러 이르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이르되...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4)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을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자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일어나서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후계자로 엘리사를 세우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으로 세우라 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주관하고 계신다. 그리고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지금도 일을 하신다. 즉 구원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야 선지자의 넋두리는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행하시므로 선지자로서의 맡은 바 책임만을 다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말씀을 전하는 자가 맡은 사명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면 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그러면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목사의 마음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을 넘어가면 이단의 교주가 되는 것이다. 즉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자가 되어 적그리스도가 된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5) 이단들의 특징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지 않는다. 그것을 믿게 되면 자신들이 가짜임이 드러나게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민교회나 한국 교회나 영적으로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단들이 청장년들을 빼앗아 갑니다. 그동안 진리의 교리...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6)

 ”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6) 선지자 직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역을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악한지 오히려 선지자를 대적하고 죽이려 한다. 본문의 말씀을 하나님의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들과의 싸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전하고자 하는데 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악한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선지자를 보내고, 이방 여인에게 가루와 기름을 기근이 있는 동안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능력을 보여 주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선지자 엘리야도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것을 백성들이 깨닫기를 원한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이 백성이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여호와와 내게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왕상 18:37)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서 깨닫게 하여 회개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사역을 한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6)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도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