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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하나님께 의존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한다. 공동체에 사람들이 모이면 범죄할 수 있고 다툼과 오해가 있을 수 있다.  만일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때에 화목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명령이다. 즉 용서의 의무와 권리를 말한다. ’의무‘라 함은 신자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인 것이고, ’권리’라 함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자유나 힘을 말한다. 범죄시에 용서의 방식대로 용서를 하고 받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그러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행하는 것이 된다. 신자들이 모인 곳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고 또한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이것을 명심하고 교인들의 모임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용서의 방식은 이러하다. 먼저 너와 그 사람만 상대하고, 둘째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라, 셋째 교회에 알리고 교회가 확인을 하고 교회 앞에서 공식적으로 확인을 하는 것이다. 이러하게 하는 것은 용서를 하는 자가 하여야하는 의무이다. 즉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여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만일 용서를 받을 자가 말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 한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 그리고 권리를 주셨다. 출교를 시키거나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고 한다. 이것이 용서하는 자가 받은 의무와 권리이다.  또한 죄인들은 명령에 순종을 하면 용서를 받을 권리가 있다. 그것은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공동체 안에서나 형제들 간에 범한 죄를 이 땅에서 풀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메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은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함께 합니다. 그의 명령을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신 5:20)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신   5:20)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법정에서나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즉 증인의 역할을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증인으로 살라고 한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6) 북 이스라엘에 아합 왕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사람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었다. 그것을 빼앗기 위하여 전 국민에게 금식을 선포하였다. 왕은 불량자 두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고 왕의 명령을 어기었다고 증언을 받아낸다. 즉 나봇이 하나님 앞과 왕 앞에서 명령을 어기어 금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무리가 나봇을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였다.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고”(왕상 21:13) 아합 왕은 나봇이 죽었다함을 듣고 포도원을 차지하러 간다.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왕상 21:16) 거짓 증인을 내세워 자신의 유익을 얻은 자의 말로는 비참하였다. 전쟁 중에 적군의 한 사람이 무심코 쏜 화살에 죽었다. 피를 흘리며 죽었는데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다고 한다. 그래서 거짓 증거와 증인을 막기 위하여 한 사람의 증인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신 17:6) 그런데 만일 거짓으로 위증하는 자가 재판정에서 거짓이 밝혀지면 그것에 해당되는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

“도둑질하지 말지니라”(신 5:19)

  “도둑질하지 말지니라”(신 5:19)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은 단순히 이웃의 것을 훔치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의미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번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다. 그것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한다. 즉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도둑질하지 말라함은 이웃의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유용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회생활에서 나타난다. 이것을 열매로 나타난다고 한다.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일로 드러낸다. 가장 무서운 죄가 이웃의 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다. 물질을 훔치는 것과 마음을 훔치는 것이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었다.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삼하 15:6) 그리하여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잘못된 사상으로 거룩한 것을 손상시킨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죄를 품으면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신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 1:15) 도둑질은 다른 사람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바가지 씌우는 행위이다. 또한 이웃과 함께 나눌줄 모르는 이기적인 행위이며 다른 사람의 행복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 하신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소유권은 인정하시나 소유권은 ...

“간음하지 말지니라”(신 5:18)

  “간음하지 말지니라”(신   5:18) 간음이란? 혼인은 남녀 간의 약속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다. 성적인 욕망을 풀기 위한 성적인 타락과는 분별하여 생각하여야 한다. 남녀의 혼인(약속)관계가 하나님의 영원한 관점으로 연결됨으로 말씀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결혼은 하나님이 짝을 지어 주신 것이라 한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6) 혼인 관계로 오는 일상의 변화가 있다. 성격 습관 문화의 차이 등에서 오는 문제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책임의 범위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성적 타락이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약속의 백성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묘사하고 있다.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랑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였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2)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깨뜨렸다고 함은 약속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음을 말한다. 즉 간음이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약속의 말씀을 뒤로하고 다른 신과 함께 한 것을 말한다. 혼인관계가 깨어짐으로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살아야 함을 상기시킨다. 혼인의 문제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결론이 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이 되시며 우리들은 그의 신부가 된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계19:9) 남녀 간의 약속의 관계로 혼인이 이루어짐과 같이 하나님과 백성들 간에도 약속으로 이루어졌다. 그 약속은 하나님의 계명이 된다. 그 계명을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살인하지 말지니라”(신 5:17)

  “살인하지 말지니라”(신 5:17) 살인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이웃을 살인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으로 없어져도 상관이 없다는 마음에서 나온다. 즉 사람의 존재와 가치를 무시하는 상태에서 살인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살인은 개인적인 합법화되지 않은 살인을 말한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살인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한다.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출 21:14) 고의로 살인한 자들의 마음에는 쓴뿌리가 있다. 개인의 이기적인 마음이 있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존재를 무시할 때에 살인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는 고의적으로 살인한 자를 죽이라 한다. 그 이유는 악이 전염되는 것을 막고 죄에 대하여 경각심을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율법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그 말씀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었다.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신 6:8) 눈썹과 눈썹 사이를 미간이라 한다. 사람의 뇌 가운데 전두엽이라는 것이 있다. 이마 뒤쪽에 있는 것으로 뇌에서 보내오는 정보를 판단을 하며 행동을 조절하는 곳이다. 즉 내 몸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통과시키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너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과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 안에 있는 쓴뿌리를 고치기 전에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사랑하여 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7:12) 새로운 생명의 속성은 사랑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제 5계명부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친다. 즉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이다. 만일 이 도리가 지켜지지 아니하면 다툼과 전쟁이 일어난다. 부모를 통하여 배우는 것은 순종이다.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순종을 하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본래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종은 이해로 되는 것이 아니라 명령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있기 때문이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또한 부모에게 불순종하거나 치는 자들에게는 죽이라 명령하셨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7) 부모를 공경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위치이다.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위탁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에게만 경외하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2) 부모에게 공경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보다 높으며, 자신을 위에서 통치하는 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경하지 않는 것은 저주와 경멸뿐이다. 그것은 교만한 마음으로서 권위자와 같아지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계명을 이해하고 지키려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모든 말씀이 명령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에게 선포하십니다. 그들의 생명의 주인은...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고 제일 먼저 얻는 유익이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복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더 나아가 화목케 하는 직분까지 주셨다. 그리스도의 대사로 임명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었다고 함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과 화목하게 하는 능력과 실력을 가졌다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이 섬김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4)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본을 보여 주셨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그리고는 섬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겠다고 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긴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눅 22:29) 예수님과 같이 겸손히 섬기는 자의 복이 있다. 주님과 함께 식탁을 함께 하며 마지막 심판 때에 보좌에 앉아 열 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생을 세상 사람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뒤를 따른다. 즉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섬기는 나라를 세우시려 하는 것이고 제자들은 출세와 성공을 이루려는 생각이다. 제자들의 생각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왕은 예수님이 되시고 권력이 막강한 좌우에 누가 앉을 것인가에 논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아버지께 의존적인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이라 하여 어린아이를 세우신다. 그리고는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의존적인 것을 친히 보여 주신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하나님께 의존적인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의 생각에는 세상의 권력을 잡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가치가 다르다. 이것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웃나라들처럼 왕을 달라고 사무엘에게 요구하였다. 이 말씀을 들으신 하나님은 저들이 나를 왕으로 섬기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다른 점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사랑과 자비로 세워져 가지만 세상 나라는 사람의 권력으로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선하심으로 인도와 보호하심으로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온 것이라 한다. 반면에 세상의 권력은 백성들의 좋은 것을 빼앗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증거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사람들의 맏아들을 대신하여 레위인을 세워 하나님의 일을 맡겼지만 세상 나라에서는 맏아들과 딸들을 왕에게 바쳐야 하고 토지의 좋은 것은 왕과 신하들에게 바쳐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사람들이 높은 권력에 오르려 하나요? 그것은 사람을 권세로 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신 5: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신   5:12) 안식일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시대적인 배경의 차이가 있다. 창세기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 출애굽기는 창조주를 거룩하고 복된 날로 기억하라 한다.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는 너희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안식을 하게 된 것을 감사하라 한다. 반면 신명기에서는 너희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노예의 상태에서 건져 주시고 새로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억눌려 있는 자들을 풀어 주시고 안식과 자유를 주신다 함이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안식일의 은혜가 온전케 된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니라”(막 2:28)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여호와와 약속된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 이것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거룩과 안식으로 택함을 받은 자들을 초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세계란 영광의 세계에 도달하는 신비한 방법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아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신 5: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아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신 5:11)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것은 죄가 된다. ‘망령되이’의 뜻은 거짓이라는 뜻과 같다. 그리고 ‘일컫는다’는 들어 올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거짓으로 들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그것에는 예배, 기도, 사회생활 가운데서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행위의 근원은 제 1계명의 중요성을 올바로 알지 못할 때에 나타난다. 즉 잘못된 망상으로 하나님을 경홀히 여긴다. 여호와의 이름은 부르지만 행동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있다. 홉니와 비느하스이다. 저들은 백성들이 여호와께 제사제물을 드릴 때에 자신을 위하여 제물에 좋은 것을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집안에 저주를 받았다.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삼상 2:34) 또한 백성들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제사 제물만 태워드렸다. 즉 헛된 제물만 가지고 와서 성전 마당만 밟는다는 것이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2) 제 3계명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언행을 조심하라 한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 떠는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함을 말한다. 그리하여 늘 성령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서는 먼저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면 경외하며 두려워하여 순종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제 1계명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잘못되면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그러...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신 5: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신 5:8) 제 1계명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제 2계명에서는 마음에서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았다면 우상을 만들 수가 없다. 스스로 살아 계시는 분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형상으로도 조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상으로 조각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드러낸다. 그래서 블레셋 신은 몸은 사람이고 머리는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종교가 많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신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신상 앞에 천지를 주관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전한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5) 창조주가 되시고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죄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1)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우상 숭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의 뜻을 따라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은 창조주의 형상까지 따라야 한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상숭배는 자신의 현실의 필요함과...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신 5:7)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신 5:7)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명령하시기를 ‘나와 너희 사이에 다른 신들이 끼어들게 하지 말라’ 하셨다. 즉 여호와를 마음에 두라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는 많은 우상들을 섬기는 곳이다. 그런데 그러한 신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우상숭배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오직 그분만을 섬길 수 있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다.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잡신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또한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 20:38) 그리고 부활한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있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출 3;16)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엘 엘룐),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 영원하신 하나님(엘 올람)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왜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 하셨는가? 그 이유는 오직 그분만이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5) 왜 우상을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사람의 법칙을 따름을 말한다. 그것은 탐욕과 정욕과 분쟁과 시기로 인한 파멸의 길로가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이 자신이 추구하여 얻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신 5:6)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신 5:6) 십계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나타나신 것이다. 홍해를 건너 온 사람들은 유월절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홍해를 건너게 하였다. 그러므로 세례나 십계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즉 시내산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십계명으로 언약을 맺으시며 택한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을 주시는 이유는 죄를 깨닫게 하여서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즉 율법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행복하다는 것이다.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즉 율법을 사람의 의지로는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왜 죄를 깨닫게 하시는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율법을 통하여 모두가 죄인이며, 스스로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깨닫게 함이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 그래서 구원자이시며 중보자가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결예식을 행하시러 성전에 들어오셨을 때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 2:25)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이르데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 2:30)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한 것이라 한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고, 중보자가 되시므로 인하여 언제든지...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 17: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 17:2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성전세를 말씀하신다. 성전세를 구하는데 물고기를 오르게 하여 입을 열어 가져다가 세를 낸다. 예수님은 집에 계시고 베드로에게 바다에 나가 낚시를 하여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한 세겔을 가져다가 성전세를 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신비한 초월의 능력이 있음을 제자들에게 보여 준다. 이 능력이 십자가의 사건에 나타날 것이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고 생각을 하기에 근심을 하였다. 즉 그들에게는 부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를 알아야 비로소 그의 고난과 수난의 참의미를 알 수 있다. 즉 부활의 은혜로 말미암아 슬픔과 고통이 기쁨으로 변한 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 동안 오병이어의 기적, 바다를 잠잠케 하시던 일을 보여 주셨고,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얻는 것을 보여 주신다.  이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안심을 시킨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죽지만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남을 믿게 하려는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베드로는 그 근본이 죄인된 인간이며 사망에 처한 자로서 생명의 속전 곧 성전세를 내야할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살아나심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으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마 17:22-23)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마 17:22-23) 예수님께서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러자 제자들은 근심이 매우 가득하였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는 출세와 성공이다. 즉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것으로 판단을 받는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하여 이용을 한다. 이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고 있는 십자가의 길에서도 나타났다. 서로 큰 권력을 잡기 위하여 싸우고 있다.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막 9:34) 예수님께서 다툼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장 큰 자는 나를 보내신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라 한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가장 큰 자로 만들어 주신다. 그리고 가장 큰 가치를 소유한 자로서 삶을 살게 한다.  그래서 진리를(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살 수 없는 것이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권력은 권불십년이라 말이 있다. 즉 아무리 높은 권력이라도 십 년은 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영원한 가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은혜는 죄사함뿐만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주어 큰 자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이 세상의 권세와 가치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법에서 벗어나느니라”(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법에서 벗어나느니라”(롬 7:2)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앞 장에 있는 말씀들을 정리하여야 한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져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인가에 질문이 생긴다. 본문에서 율법을 의인화하여 말씀한다. 전에는 율법에 매인 자가 되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사람들 가운데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자가 없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그러므로 율법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와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자가 되면 생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왜 그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람으로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기 때문이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은 자들은 더 이상 율법과 상관이 없는 자들인가에 대한 질문을 본문이 다루는 것이다. 답은 필요하다 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어떤 기능을 하는가? 신자의 삶 속에서 죄를 알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자동차의 계기판과 같고 고속도로의 차선과도 같다. 즉 율법의 말씀의 범위를 넘어 감으로 인하여 죄를 깨닫게 한다. 그래서 죄를 깨닫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와 회개와 용서를 구하면 사함을 받을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전...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3) 여호와의 율법의 약속을 보면 불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즉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이방나라를 빌려서 치신다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방 신들을 섬기고 있다. 그런즉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밨에 없다. 그래서 블레셋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가시가 되게 한다. 블레셋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방신들을 버리면 된다. 그래서 이제 사무엘이 이스라엘에 사사가 되어 백성들에게 외친다. 이방신들을 버리고 온전히 여호와만 섬기라 한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3) 그리하였더니 백성들은 이방신들을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기로 한 것이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아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삼상 7:4)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금식을 하며 회개를 하였다. 블레셋 방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곳에 모였다고 함을 듣고 올라온다. 이에 백성들은 두려워하며 사무엘에게 이르되 여호와께 구원을 부르짖으라 한다. 이에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며 기도하였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군대가 싸우러 가까이 왔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불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어지럽게 하였다.  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삼상 7:11)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스라엘이...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올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삼상 6: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올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삼상 6:5)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땅에 거하면서 그 땅에 심한 종기가 나게 하여 고통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삼상 5:12) 그리하여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돌려 보낼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들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 지혜를 구한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재앙을 내리셨던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궤를 돌려 보내되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한다.  속건제는 이웃의 것에 피해를 끼쳤을 때에 죄사함을 받기 위한 제사이다. 그래서 원래의 것과 1/5을 더하여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러면 독종으로 인한 병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를 만들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블레셋 땅을 떠나시면서 재앙을 거두실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떠나시는지를 암소에게 수례를 메우고 떠나게 한다.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들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삼상 6:10) 무슨말인가 하면 어미 소는 송아지를 두고 떠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어미 소가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땅에서 다곤 신을 이기고 블레셋을 떠나는 것이다.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삼상 6:11) 이스라엘 백성들의 도움이 없이 여호와는 스스로 블레셋을 이기고 돌아오신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고도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돌아오는 날에 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