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게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욥 5:1)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게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욥 5:1)
엘리바스는 욥의 고난이 죄로 인한 것이라 하며 정죄하고 있다. 욥 5장에서 하나님께 회개하면 구원을 받고 자손이 번성하며 장수 할 것이라 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욥에게 권면하고 있다. 그래서 나 같으면 하나님을 찾을 것이고 기도하겠다는 것이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욥 5:8)
그리고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하시는 분으로서 우주 만물을 주관하고 계심을 말한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일을 행하시며 기인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욥 5:9)
또한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을 한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욥 5:17)
그러면서 회개를 하면 복을 받는 것을 나열한다.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욥 5:19)
욥이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훌륭한 신앙 고백이다. 그러나 욥이 고난을 당하는 상황을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즉 인과응보의 논리로 욥을 바라보고 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나 네가 지금 가난하고 아픈 것은 네가 교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욥 5:12)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성도의 성화를 위한 도구임을 말한다. 하지만 엘리바스는 욥의 고난을 죄에 대한 형벌적 징계로만 보는 것이다.
생각! 욥의 고난은 죄를 씻기 위한 징계가 아니라 사탄의 참소에 맞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엘리바스의 신학은 보상의 관계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성도의 궁극적인 복은 하나님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른 믿음을 갖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보상 주의로 신앙을 이해하면 스데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그 자체가 좋아서 돌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옳고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슬픔을 당한 자에게는 금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나라면 하면서 자기의 경험을 주장하지 말하여 하고,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것은 금하셔야 합니다.
앨파소열린문장로교회 장용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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