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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삼상 27:4)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삼상 27:4)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녔다. 그런데 유다 땅에서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택한 곳이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를 찾아간 것이다.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삼상 27:2)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피신을 함으로 인하여 사울은 다시는 수색을 하지 않았다.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삼상 27:4) 그리고 아기스 왕도 다윗이 피신해 온 것을 반기었다. 그 이유는 다윗은 사울과 사이가 안 좋은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편에서 싸울 것이며 자기의 부하가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삼상 27:12) 다윗은 시글락 땅에서 일년 사 개월을 살게 되었다. 그곳에 살면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아말렉을 진멸한다.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삼상 27:9) 아말렉을 진멸하였지만 유다 지역을 쳤다하며 아기스에게 말한다. 아기스는 전쟁에서 이기면 포로를 잡아와야 하는데 가축들만 가져온 것을 이상히 여긴 것이다.  그리고 시글락 땅에 살면서 이방 나라들을 침략을 하면 블레셋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을 생각하여 아말렉 진멸을 숨겼다.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서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삼상 27:11)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왕국을 세우십니다. 즉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과정에서...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삼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삼상 26:9)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국을 세우시는데 친히 간섭을 하신다. 이것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모형이 된다. 다윗은 또 다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다. 사울의 일행은 지치고 피곤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삼상 26:7) 다윗의 신하들은 사울을 죽일 것을 부추기고 있다. 만일 다윗이 죽이지 않으면 아비새가 죽이겠다는 것이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삼상 26:8) 그러나 다윗은 적극적으로 아비새를 만류한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삼상 26:9) 다윗은 앞 장에서 나발을 죽이려 했던 사건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것은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만일 다윗이 사울을 죽이고 다윗의 왕국이 세워진다면 사람의 칼로 세워진 나라가 된다. 그러면 세상 나라와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다윗을 죽이려 하는 사울은 끊임없이 추적을 한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맡긴다.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삼상 26:23) 다윗의 기도이다. 오늘 사울의 생명을 중히 여긴 것같이 자신의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시고 모든 환난에서 구하여 달라고 한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게 막았느니라”(삼상 25:33)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게 막았느니라”(삼상 25:33) 삼상 25장에서는 다윗이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범죄를 할 번하였던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 손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심판을 하려 하였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다윗과 일행은 먹을 양식이 필요하였다. 유목민들에게는 양의 털을 깎는 날이 잔치 날이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과 지나가는 나그네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즐거워한다. 다윗은 소년 열 명을 보내어 음식을 얻으려 하였다.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삼상 25:7) 하지만 다윗에게 돌아온 답변은 먹을 것을 줄 수 없으면 무시하는 내용이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삼상 25:10) 그래서 다윗이 나발의 집에 서서 소변을 보는 자들은 다 죽이라 명령을 한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삼상 25:22)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원하는 것이었지만 그분의 뜻이 아니었다. 다윗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서 백성을 죽이면 안 될 일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악행을 막고자 하여 아비가일을 보낸 것이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상 25:26) 즉 아비가일의 간청은 나발에 대한 심판은 여호와께 맡기시고 칼을 거두라는 것이...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마 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마 20:34) 맹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침을 받자 곧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즉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가 가신 길을 바라보며 감을 말한다. 그가 지금 어디에 계신가? 하나님의 집,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맹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듯이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됨을 말한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마 20:34)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래서 그의 몸의 지체가 되는 자들은 명령에 순종을 한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2:22)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그런데 본질이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에베소 지역은 우상의 신전인 아데미 신전이 넷이나 있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가정에서 모이고 있다. 그 교회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려 오는 길에 외형적으로 웅장한 신전을 지나쳐야 한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위축이 되었다. 외적으로 건물이 크면 신도 커 보이고 건물이 외소하고 모이는 수가 적으면 신도 작아 보이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바울은 편지를 보낸다. 너희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한 신령한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만들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여 그의 기쁨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과 지혜를 교회를...

“맹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마 20:30)

 “맹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마 20:30) 본문의 말씀의 배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행하여 올라가시는 길이서 일어난 사건이다. 즉 십자가에 죽으시러 가시다가 맹인을 고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 섰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자가 없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을 못하였는가? 이것에 대하여 두 맹인을 통하여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영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게 한다.  맹인은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서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 맹인들의 눈을 떠서 다윗의 자손을 보게 하며 찬양을 받으신다. 이러하듯이 영적으로 맹인 된 자들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새롭게 창조된 자가 되어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령이 우리 안에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으심, 부활, 재림에 대하여 알 수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그래서 성령이 없으면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고 성령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닌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로 역사하신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기업인 천국으로 향하게 하신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도 고난과 어려운 생활이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구원의 시작과 끝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며 전도를 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궁금함도 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목표와 목적을 정하시고 방법과 수단도 정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를 하라는 이유는 구원의 완성을 행하여 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위로의 말씀이 본문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방법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고 보증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선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이루시는 방법이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하여 선한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이 하시므로 우리들이 실패시키려면 그를 실패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들은 그에게 간섭을 받는 자들이며 복을 받은 자들이다.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가게 한다는 것이다. 고난의 길에는 회개가 동반되어야 믿음이 성장할 수 있다. 즉 고난과 고통을 통하여 자신의 불순종함과 무지함을 깨닫는 것이다. 이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셨던 길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8:29)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들을 부르심은 거룩과 영광...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삼상 24:6) 사울은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돌아오니 다윗에 대한 정보가 있다. 다윗이 엔게디에 있다는 것이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삼상 24:1) 그래서 전쟁을 치루느라 몸과 마음이 지친 군사들을 데리고 엔게디 광야로 간다. 광야에 있는 굴 깊은 곳에는 다윗과 함께 하는 자들이 있었다. 사울은 용변을 보러 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에 다윗을 따르는 자들이 여호와께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고 한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자기의 손으로 죽일 수 없다고 하였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삼상 24:6)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잘랐다. 그리고 외친다. 다윗은 사울을 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곹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삼상 24:11) 다윗은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사울에게 보복을 할 것이라 한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는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복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삼상 24:12) 이 말을 들은 사울은 목소리를 높여 울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울은 것이 아니다. 잠시 감정의 변화로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사울은 지난 일에 대하여 양심에 부끄러움은 느꼈지만 유효적인 돌이킴의 회개는 아니었다. 하나님의 ...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인을 구원하니라”(삼상 23: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인을 구원하니라”(삼상 23:5)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국을 세워가는 것을 삼상 23장에서 볼 수 있다. 다윗을 민족의 지도자로 강력히 부각을 시키는 것이다.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 그일라 사람들의 타작 마당을 탈취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백성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대적이라 생각하는 다윗을 추적하고 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고 있지만 그일라 주인들을 구원한다. 즉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서 그일라 주민의 가축을 끌어온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삼상 23:5) 다윗은 그일라를 구원하는 문제를 여호와 하나님께 묻는다. 그와 함께 하는 자 가운데 아비아달이 에봇을 가져 왔다. “이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삼상 23:6) 그런데 그일라에 사울의 첩자가 있어서 다윗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알린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여호와께 묻는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삼 23:11) 그리하여 다윗과 일행은 그일라를 떠나 엔게디 광야로 갔다. 그리고 바위를 사이에 두고 다윗의 군대와 사울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사울의 군사는 삼천 명이고 다윗의 군대는 육백 명이다. 만일 전쟁을 치루면 사울의 군대가 우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때에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 땅을 침입하여 온다, 그래서 사울의 군대는 추적을 멈추고 블레셋 군대와 맞서기 위하여 간다. 그러므로 그 바위는 다윗에게는 방패가 되는 것이다.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가량이었더라”(삼상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가량이었더라”(삼상 22:2) 다윗은 피난길에 올랐고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역모에 가담한 자들이 되었다. 그래서 아둘람 굴로 피신을 한다. “그러므로 그곳을 떠나 다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삼상 22:1) 또한 사울 왕에게 환난 당한 자들도 함께 하였다. 사울의 광기로 정치적으로 고통을 당하거나, 부정한 세금을 부과하거나 높은 이자로 인하여 고통하는 자들과, 사울의 비도덕성과 영적인 탄압으로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모인 것이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사백 명이며 그들은 다윗 왕국을 세우는데 함께하는 자들이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가량이었더라”(삼상 22:2)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점점 타락하고 쇠퇴해 가는 사울 왕국에서 침묵하고 안주하기 보다는 장차 이스라엘을 새롭게 할 자로 부름을 받은 다윗과 함께 고난을 당하기를 기뻐한다. 이렇게 모인 자들 가운데는 무기를 든 용사들이 있었고 선지자와 지혜로운 자들이 함께 하였다. 여자와 어린 아이를 계수하지 않은 사백 명이다. 다윗은 함께 하는 자들과 모압 미스베로 간다. 모압은 다윗에게 외가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이 다윗을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와 능력으로만 해결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이 말씀은 자신의 생명이나 구원을 부모도 할 수 없으나 오직 하나님만 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찬양을 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그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삼상 21:10)

  “그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삼상 21:10) 다윗은 사울왕을 피하여 피난길에 오른다. 성경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이것을 놓치면 사람의 생각으로 계속적인 의문이 생기게 된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며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자인데 어찌하여 피난길에 올라 죽도록 고생을 하는가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생각으로 보게 되면 더 많은 은혜와 위로를 받게 된다. 다윗은 수금을 잘 타는 자이며 용감한 용사이다.  블레셋과 전쟁에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 하는 여인들의 노래가 있다. 이러한 다윗을 이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피난길에 오르게 하는 것이다. 다윗은 피난길을 떠나면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무기를 든다. “제사장이 이르되 네게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갈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하더라”(삼상 21:9)   그 무기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빼앗은 칼이다. 그 칼은 거장 골리앗이 들던 칼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위협적이겠는느가?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그를 블레셋으로 가게 한다.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들고 간 것이다. “그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삼상 21:10)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훈련을 시키신다. 즉 골리앗의 칼을 들고 블레셋을 갔지만 오히려 자신이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위험이 더 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다윗을 구원하신다. 갑자기 침을 흘리며 미친 사람이 되었다.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며”(삼상 21:1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윗이 사망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