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은 조상들이라”(대상 1:1-4)1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은 조상들이라”(대상 1:1-4)1 역대상,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데 기록 목적이 있다. 즉 인류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려 함을 깨닫게 한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흙으로 창조가 되어 연약하여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야 함을 증거하고 있다. ‘에노스‘는 ’셋’이 낳은 자식으로 ‘약한 사람’이란 뜻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성경은 포로에서 돌아와 낙심과 좌절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역사가 제시하는 방향과 목적을 향하여 제시하며 권면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이므로 소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됨을 말한다. 언약의 백성의 족보와 육체의 족보를 소개한다. 언약의 백성의 족보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연속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유다 지파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낙심 가운데 있을지라도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소망을 가져야 한다. 지금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는 집고 성전이 없는 상태이다. 포로 후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 될 것과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토록 드러날 것을 계시한다. 이러한 말씀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열망하였다. 예수님이 정결예식을 하러 제 팔일에 성전에 올라가셨다. 그 때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눅 2:26) 마침내 예수님을 보았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오니 이는 민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 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왕하 25:27)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 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왕하 25:27) 바벨론 왕인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올라와 여호와의 성전의 금그릇을 다 파괴하였다. “그가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금그릇을 다 파괴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왕하 24:13) 그리고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내시들과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왕하 24:15) 그리고는 바벨론 왕이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숙부인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숙부 맛다니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왕하 24:17) 이제 예루살렘의 최후를 맞게 된다.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을 배반하자 느부갓네살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올라와 일 년 육 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에워싼다. “그 성이 시드기야에 왕 제십일 년까지 포위되었더라”(왕하 25:2) 그래서 성 안에는 기근이 심해져 양식에 떨어졌고 마침내 성벽이 파괴된다. 시드기야는 밤중에 도망을 치려 했지만 바벨론 군대에 잡혀 바벨론 왕에게 끌려가 심문을 당하고 두 눈이 뽑히고 놋 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바벨론 왕은 유다의 총독으로 그달리야를 세웠지만 유다에 남아 있는 던 자들이 그를 암살한 후에 이집트로 도망을 간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지파에서 왕권이 나오게 하기 위하여 여호야긴을 옥에서 나오게 한다.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 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왕하 25:27) 바벨론의 새 왕인 에윌므로닥은 여호야긴을 모든 포로 왕들...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왕하 24:3)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왕하 24:3) 요시야 왕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인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여호와 보시기애 악행을 행하므로 애굽 왕에 잡혀가 애굽에서 죽는다. 그리고 애굽 왕인 느고가 여호아하스의 동생인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우고 은과 금을 거둔다.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그가 바로 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백성들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징수하였더라”(왕하 23:35) 이후에 남 유다에 일어나는 상황들은 패망의 길로 간다. 왜 그런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왕하 24:3)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침략을 하게 하신다. 여호야김은 삼 년 동안 바벨론에게 조공을 바치다가 배반을 한다.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 년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더니”(왕하 24:1) 이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멸망시키겠다는 얘언을 이루기 위함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왕하 24:2) 여호야김이 죽고 그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백성들은 늘 불안 속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남쪽으로는 애굽이 있고 북쪽으로는 바벨론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남 유다는 강한 나라에게 늘 침략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점령하셨음이니라”(왕하 24:7) ...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6) 요시아 왕은 여호와의 뮬법의 말씀을 잘 지키었다. “요시아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그런데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 망하게 된다. 그 이유는 므낫세의 악행으로 인하여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6) 므낫세의 악행은 이러하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었던 우상의 산당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여호와의 성전 안에 두었다. 또 일월성신 숭배를 위하여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제단을 쌓고 경배하였고 이방 민족의 역겨운 풍습인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였다. 그는 점술과 마술을 행하였고 신접한 자인 무당과 박수(마술사)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엄격히 금하신 행위를 하였고, 더 악행을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비롯한 무죄한 자들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할 정도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의 악행은 이방나라인 아모리 족속보다 더 심하였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고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행위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겔 36:30)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럽힌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다시 거룩하게 위하여 새 약속을 하신다. 즉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9)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생각하며 그의 명령이 생각난다. 그것은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제자처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제자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할 수 있어서 목표를 향하여 나갈 수 있는 자이다. 그래서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세례를 받는다고 함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준비가 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세례나 성찬식은 교회 안에서 행하여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 되고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세례를 받았다고 함은 머리에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이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고 함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이 된다. 이 은사들을 통하여 머리에(예수 그리스도)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머리는 몸에게 명령을 하는 것만큼 순종하여야 한다. 그리고 지체는 머리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그러므로 교회는 효율적인고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하여 모이는 곳이 아니라 훈련을 받기 위하여 모이는 곳이다. 즉 십자가의 도를 배워서 악한 것을 버리고 선한 것을 채워야 한다. 십자가의 원리는 순종이다. 믿음의 덕목은 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2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2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받으라 하셨다. 그렇다면 성령의 권능은 무엇을 말하는가? 교파가 갈리는데 있어서 성령의 권능이 무엇인가로 나뉘게 된다. 늘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령의 권능을 감정이나 체험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오순절날에 오시는 성령은 이미 약속된 성령이시다. 이 성령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성령에 대하여 알고자 할 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제자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확인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부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성령의 권능이라 함은 먼저 성령의 임재인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의 은혜를 말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세상 끝까지 전하되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베드로에게는 열정이 있었다. 그러한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면 여러 사람들을 실족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명령하는 일만 하여야 한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를 수 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이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것에 대하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돌로 쳐 죽였다. 하지만 그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자 자기의 의를 버리고 십자가의 도를 따랐다.  그러니 먼저 성령의 권능은 우리 안에 있는 자기의 기질을 예수 그리...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사도 바울은 구원의 교리를 전하였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는 성품적인 변화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 성품적인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는 것이다. 즉 온유한 마음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는 것을 말한다. 성품적인 변화가 임하고 이제는 삶의 형태에서 나타나야 한다. 즉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대인관계를 형성하여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각 자가 맡은 짐을 지는 일에 배우고 행하여야 한다. 즉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장로는 장로다워야 함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아는 것만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스스로 선 자라고 교만하지 말고 자신의 행위를 살피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하여 말씀 전하는 자와 좋은 관계가 이어져야 한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성경에서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믿음의 법칙을 말한다. 그런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법칙을 초월적으로 넘어선 것을 말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하나님의 구원의 심는 법칙은 이러하다. 썩을 것을 심었는데 썩지 아니하는 부활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선을 행하게 되면 그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여 영광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심기만 하면 되고 자라게 하시고 열매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야 범사에 감사함에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들은 헌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