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나갈 때에 분명한 목적을 갖고 나가야 한다 . 단순히 복을 받으러 나가는 것보다 근본적인 더 중요한 것이 있다 .   근본적인 중요함은 “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녀 ” 라는 인식이다 . 왜 중요하냐면 하나님은 언약의 관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 와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야 한다 . 죄 지은 자는 당연히 언약의 관계에서 멀리 떨어지게 된다 .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고 약속의 언약을 다시 갱신을 하여야 한다 . 예배의 중요성은 언약의 재갱신에 있다 .   어리석은 신자들은 언약의 약속의 내용으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주여 ! 주여 ! 하고 있다 . 약속한 내용을 지켜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열심히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니다 . 오히려 그들이 전통의 날까지 지정하여 제사를 드렸다 . 그런데 그들이 망하였다 . 왜 그럴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내용들을 알지 못하였고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다 .   하나님 나라의 왕 앞에 예배를 드리러 나아간다 . 나아가는 자는 백성이다 . 백성은 왕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 그런데 오늘날 백성들은 왕의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있다 . 왕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권세를 갖고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   “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 신 5:3)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기독교의 믿음은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 왜 그런가하면 보편적으로 쓰는 믿음이라는 단어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   기독교의 믿음은 이미 합의가 된 약속의 내용을 지키는 것이다 . 약속은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이 합의를 하고 지켜야 하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 .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에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믿어야 한다 . 약속의 내용은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 몸이 다시 사는 부활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이 약속하시고 피로 언약을 세우셨다 . 이 언약을 체결하는 신자들은 신앙고백과 세례로 약속에 합의를 한다 . 그렇게 되면 약속을 하신 분이나 약속을 따르겠다고 합의한 자들은 약속된 조항들을 지켜야 한다 , 만일 약속을 위반하게 되면 범법자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된다 .   약속된 내용들을 지킴으로 인하여 언약의 관계가 유지하게 된다 . 만일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언약을 파기하는 자가 된다 . 그래서 언약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지켜야할 법을 배워야 하고 만일 지키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죄사함을 받아야 언약의 관계가 유지하게 된다 .   기독교의 믿음은 지켜야할 것에 반드시 행위를 함께한다 . 이념이나 사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함께 하는 계명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합의하기로 한 자들만이 지킬 수 있는 것이다 .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   2: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인생의 삶은 ‘ 고달프다 ’ 라고 말한다 . 인간의 삶은 고통스럽고 아픔이 있다는 것이다 . 그것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눈물이다 .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은 이유가 삶이 고달프기 때문에 외면하고 싶은 무의식적인 반응이다 .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삶의 고통과 아픔을 겪고 있는 자들을 찾아 다니셨다 . 그리고 직접 인간에 겪고 있는 고통을 체휼하셨다 . 배고픔도 당하시고 , 무시와 멸시도 당하시고 심지어는 채찍으로도 맞으셨다 . 그래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   우리 주님은 인간이 겪는 고통과 아픔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다 . 주님이 손수 그 길을 가셔서 그것이 방법이며 목적이 되었다 .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다 .   주님이 가셨던 그 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이다 . 죄의 고통과 아픔을 이기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 그 길을 갈 때에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평안을 주신다는 것이다 . 그 방식은 고통과 아픔을 평안과 기쁨으로 이기게 한다 .   그래서 신자들은 이른 새벽 단잠을 뒤로하고 믿음을 세우려 지키려 채우려 새벽예배로 달려간다 . 오늘도 죄의 고통과 아픔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말씀 밖에 없다는 신앙고백으로 엎드리는 것이다 . 이것이 새벽예배를 드리는 기쁨이다 .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 눅 5:31)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주술적인 행위 즉 ,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대해서는 일찍이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바가 있다 .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귀를 기울이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   돌로 새기고 나무에 새긴 우상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한다 . 그러나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작은 소리로 아뢰더라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들으시는 분이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말 못하는 신이나 알지 못하는 신들을 섬기는 자들이 있다는 증거가 있다 .   그러한 이방인들 앞에서 그들처럼 중언부언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께 기도를 할 때에 말로서 아뢰고 또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이 이방신을 섬기는 것과 다른 것이다 .   우리들의 기도 속에 담긴 문제들의 해결이 말씀 안에 담겨 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께 기도를 아뢰면서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기도를 간절히 반복하며 기도를 하지만 말씀을 듣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 기도하며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데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렇게 하여야 한다 . 왜냐하면 말씀을 따르는 자에게는 이미 복이 임한 것이다 . 즉 말씀을 지키는 자체가 복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방식이다 . 자녀들이 아버지께 나아와 아뢰면 아버지는 들으시고 응답을 말씀으로 하시고 , 주신 말씀대로 행하면 복이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살아 움직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   이방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복채를 내어놓고 복을 빌지만 기독교는 죄를 들고 나아가 겸손함으로 아뢰고 주신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 . 이것을 세상 사람에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무속신앙은 우주만물에 존재하는 것들에는 스스로 존재하는 힘이 있어서 , 인간이 겸손한 자세로 정성과 치성을 드리면 기운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 그러나 그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인격 , 성품에 관한 가르침은 없다 .  그러므로 경전은 당연히 없다 . 그런데 묘한 속임수가 그 사물에 ‘ 님 ’ 자를 붙임으로 인격화시켜 비는 자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   즉 , 문제가 생겼을 때에 생각을 하거나 합리적인 노력으로 해결을 하기 보다는 주문을 외우며 겸손한 자세를 취하면 된다는 방식이다 . 그런즉 비는 자들에게는 복채와 정성만을 가지고 나아가 주술적인 행위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한국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 가운데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 그들에 문제점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알고자 함이 없다 . 성경 공부나 성경적인 설교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   신자들이 주님의 교회로 모이는 것은 찬양과 감사를 드리기 위함이다 . 죄인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한 찬송이다 . 구원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됨으로 주시는 약속의 말씀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주시려는 것은 영생이다 . 즉 , 기독교의 복은 영생이다 . 영생의 복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그러나 아직도 교회 안에서 주술적인 행위를 통하여 복을 비는 자나 주술적인 행위를 통하여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자는 다른 교훈을 따르고 전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하였을 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 그 사건이 본보기의 거울이 되어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있는 말씀이다 . 즉 하나님이 하시려는 마음의 작정이다 . 하나님의 의지는 성경을 해석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에게 임할 때에 은혜라고 한다 .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에게 임하면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변하게 된다 .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은혜가 임하였던 자들이었다 .   사사 드보라는 한 남자의 아내이다 . 지금으로 표현한다면 가정주부였다는 것이다 .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 하나님은 율법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자를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신다 .   그 당시 가나안 왕 야빈은 철병거 구백 대가 있어서 이스라엘을 20 년 동안 이스라엘을 심히 괴롭혔다 . 하나님은 드보라에게 다볼 산으로 나아가 전쟁을 하라 하셨다 . 그리하여 바락이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명을 거느리고 싸움터로 향하였다 .   그런데 싸움은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군대장관 시스라와 온 군대와 싸우셨다 . 가나안 군대의 병사가 다 죽었다 . 오직 군대장관 시스라만 살아서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에게로 간다 .   그 당시에는 목축을 하던 자들은 하류층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 유목민들은 가축들의 풀을 위하여 이곳저곳으로 자주 옮겨 다녀야 했다 . 그리고 천막을 세울 때에는 남편이 기둥을 붙잡고 있으면 아내는 말뚝을 박았다 .   야엘은 한 남편의 아내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 남편이 바깥일에 힘들고 지쳐 집에 오면 따듯한 우유를 내어주고 누워있는 남편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일은 습관적인 것들이었다 .   가나안군대 장관 시스라가 야엘의 집에 숨어 있을 때에도 평소에 하던 것처럼 하였다 . 지쳐있는 시스라에게 우유를 주고 이불을 덮어 주고 쉬게 하여주자 잠이 들었다 . 야엘에게 말뚝을 박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 천막을 세울 때...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찐빵에 앙꼬가 없다면 찐방이 아니다 . 만일 기독교인에게 사랑이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 자요 , 그리스도가 함께 하지 않는 자이다 .   신자라면 사랑의 본질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랑없이도 선지자 노릇하고 , 귀신도 쫓아내고 , 많은 권능을 행할 수 있다고 하셨다 .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천국에 결단코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 사랑을 전하는 자들을 알아주신다 .   그 사랑은 죄로 죽은 자를 위하여 독생자 아들을 주신 사랑이다 . 그 사랑을 받은 자는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 사랑의 특성은 받은대로 전할 수밖에 없고 , 그 사랑의 성품대로 나타낼 수밖에 없다 .   하나님의 사랑은 불의한 자를 용서하고 , 악을 선으로 갚고 , 분을 품지 않고 , 악의를 의도적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행하셨다 . 그래서 나도 그렇게 행할 때에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고전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