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생명의 말씀 “사십까지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신 25:3)

  “사십까지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신 25:3) 성경에서는 종종 40이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심판’과 ‘연단‘ 또는 ’시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노아의 홍수 때에 비가 사십 주야로 쏟아졌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 7:12) 모세가 두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 사십 일 동안 있었다. “모세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 24:18)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꾼이 사십 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하였다. “사십 일 동안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민 13:25)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기도하셨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 4:2)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가 고난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악인을 정죄하여 살인죄에 해당이 되면 사형을 시켜야 한다. 그러나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아니라면 정신을 차리게 하여 선한 길로 인도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사십 대를 넘기면 사람이 죽거나 불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신 25:2) 그런데 만일 때리는 자가 사십 대를 때리려 하다가 그만 숫자를 잃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때린 것이다. 사도 바울이 약함을 자랑할 때에 사십에 한 대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고후 11:25) 이러한 일로 바울은 연단을 받은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사심이 없...

생명의 말씀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 24:7)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 24:7)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이었다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지켜야 한다. 율법에는 공동체적 사회생활 규범이 있다.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할 거룩한 규범이다. 신명기 24장에서는 이혼과 재혼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이혼과 재혼을 하는데 있어서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할 것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거룩한 땅을 더럽히지 말라 한다.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신 24:4) 병역면제에 관한 규례가 있다. 결혼을 한 사람은 일 년 동안 아내와 집에 있으라 한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신 24:5) 그 이유는 자식을 낳기 위하여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긍휼의 정신으로 생명에 관한 것은 잡지 말라 한다.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신 24:6) 사람을 유괴하여 몸 값을 요구하는 자는 단호히 죽이라 한다.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 24:7) 가난한 자에 대한 보호법이 있다. 이웃에게 꾸어줄 때에 전당물을 잡아야 하는데 그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가져 나오지 말라 한다.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신 24:10) 고용된 자를...

생명의 말씀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신 23:24)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신 23:24) 가나안 땅에 사는 거룩한 백성들이 지켜야할 생활지침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 사랑을 받는 자들은 사랑을 받는 것을 권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하여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것을 잊지 않도록 촉구하는 규례 중 하나이다.  즉 굶주린 이웃이나 길가던 배고픈 나그네가 비록 남의 포도원이나 곡식 밭에 들어가서 주린 배를 채운다 할지라도 관용과 긍휼의 정신으로 그것을 용납하라는 규정이다.  이 규정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날에 이삭을 잘라 먹었다가 바리새인들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는 잘라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릇에 담지는 말아야 하고 낫을 대지는 말아야 한다. 그릇에 담지는 말라고 하는 것은 절취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배고픈 자의 허기를 달랠 수는 있지만 그 선을 넘으면 남의 소유를 내 멋대로 반출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행위는 분명히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위배가 됨으로 율법은 엄하게 금한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사랑과 공의가 좌로나 우로나 전혀 치우침이 없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정의 안에서 시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정의가 먼저 있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는 사형에 해당이 된다.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데 먼저 죄에 대한 심판이 먼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킴으로 인하여 부활의 은혜를 주신 것이다.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복을 받는데 있어서도 정의 안에서 받게 됨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말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당부한다. “형제들아 ...

생명의 말씀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8) 좋은 밭이라 함은 마음이 거듭나서 열려있는 자이다. 즉 성령으로 인하여 마음이 열려진 것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열매를 맺는다고 함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 결과로 얻는 것을 열매라 비유하고 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은 그의 아들의 말씀을 듣고 계명을 지켜 행함을 말한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좋은 밭이 되려면 밭을 잘 갈아야 한다. 소에게 쟁기를 매게 하고 땅을 깊게 갈아야 씨가 속으로 들어가 싹을 낼 수 있다.  신자들도 좋은 밭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밭을 갈아야 한다. 마음의 밭을 간다고 함은 회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기 때문에 더러운 정욕이 있는 곳에 함께 거할 수 없다. 그런데 회개라 함은 회심(마음을 돌이키는 것)과 돌이킴의 순종이 있어야 한다. 말로만 회개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돌이킴의 순종이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함을 말한다.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행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나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신 이유와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씨 뿌리는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데나 떨어지더라도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오직 좋은 밭에 떨어져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마 13:3)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를 말씀하신다. 비유로 말씀하심은 들을 수 있는 자만이 듣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 천국 복음이 땅에 떨어져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밭이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고 열매가 없음을 말한다. 이 말씀은 호수가에서 배에 올라 온 무리에게 전하신 말씀이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마 13:2) 음란한 세대는 표적을 구한다고 하셨다. 즉 정치적 군사적 메시야가 와서 큰 이적으로 로마를 심판하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는 천국복음은 거듭남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말씀하려 하시는 것이다. 즉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의 자리로 가는 것을 말한다. 네 가지 밭은 길가, 돌짝, 가시덤불, 좋은 땅이다. 즉 세 가지의 밭은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다. 달리 말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은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열매를 말씀하시면서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 길 가 밭은 마음이 굳은 자이서서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거부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그리고 죄를 사랑하는 자이다. 돌 짝 밭은 거듭나지 못한 자이므로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마음의 특징은 신앙고백도 하다가 병에 들거나 직장을 잃게 되면 신앙을 소유할 때처럼 신앙을 버린다. 가시덤불 밭은 마음에 근심이 있는데 그 근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라지...

생명의 말씀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14)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교리는 교회 안에도 있다. 거짓 교리는 밖으로는 마귀의 공격이 있으면 교회 안에는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이 활동한다. 바울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거짓 교리를 따르는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있다. 그래서 그는 강경한 말로 우리들이 이미 가르친 것들을 기억하고 굳게 지키라 한다.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살후 3:4) 그러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강력하게 교인들에게 임하여 강건하게 하며 인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교회 안에 잘못된 교리라 함은 예수님의 재림이 곧 임한다고 하여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말한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 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살후 3:10)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에도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고 하여 난리를 친 적이 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살던 집도 팔고 거리로 나와 피켓을 들고 재림의 날을 외쳤다. 정작 그들이 주장하던 그 날이 임하였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없었다. 그 현장은 난리가 났다. 거짓에 속은 자들이 분노하여 물건을 던지며 난장판이 되었었다.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어리석은 자들이 있음과 같이 오늘날에도 어리석은 자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강경한 말로 전한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14) 바울이 전하는 서신의 내용대로 따르지 않는 자들과는 사귀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원수같이 생각하지 말로 형제같이 권면하라 명하고 있다. 거짓 교사들이 거짓 교리를 전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사도바울...

생명의 말씀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줄지니”(신 22:2)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줄지니”(신 22:2) 신 22장은 이웃 사랑에 대한 규례이다. 즉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구체적인 행동지침이다. 최소한의 법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이웃에게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축을 기르기 때문에 많은 유목민이 있었다. 그들은 가축을 방목을 하기 때문에 가축들 중에는 무리를 이탈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사울 왕의 아버지인 기스가 암나귀를 잃고 그의 아들에게 나귀를 찾아오라는 일이 기억할 수 있다.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의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한 사환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삼상 9:3) 즉 길 잃은 짐승을 보면 못 본체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모르는 척 하지 말라함이다. 이웃 사랑이라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선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이것이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차이점이다. 세상 나라는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도덕을 지킨다. 이것을 공중도덕이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범위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도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원수의 가축이 웅덩이에 빠졌더라도 건져 주라 한다.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을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신 22:1) 또한 짐승에게 멍에를 매개 할 때도 싫어하는 것과는 함께 하지 말라 한다. 소와 나귀를 함께 하지 말라 한다.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신 22:10) 그 이유는 나귀의 입에서 냄새가 나는데 소가 몹시 싫어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일날 오전 11시에 주일예배를 드리게 된 이유도 아침 시간에 짐승들과 ...

생명의 말씀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마 12: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마   12:44)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우상숭배를 척결하며 새언약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약속된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임을 이적과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입증을 하였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더러운 귀신이 집을 나갔다고 한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마 12;43) 이제 더러운 귀신이 나갔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맞이하여야 한다. 즉 구원자로 맞이 하지 않으면 더러운 귀신이 다시 들어온다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은 인간의 마음속에 거하며 자기에게 종속되기를 열망한다. 귀신은 쉴 곳을 찾아 헤매다가 나왔던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마 12:44) 즉 이전에 인간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 부리던 때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직도 인간을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을 한다. 메시야를 기다리며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았지만 영적으로 깨끗함을 얻지 못함을 말한다. 바리새인들의 믿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종교형식에 매여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을 보면서 복음에 대하여 관심은 갖고 있긴 하나 아직도 관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즉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형식주의적인 태도는 잘 갖추고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의 참 뜻은 가리워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 말씀의 참 뜻이라 함은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말씀을 갖고 있다고 자랑을 하고 있는데 사람의 생각과 전...

생명의 말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 한다.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고 악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33) 즉 나무가 악하기 때문에 나쁜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본문에 적용을 하며 그 마음에 악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알세불이라 하였음을 말한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마 12:24)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을 입어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들 고침을 보고도 메시야를 부인하는 자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마음에 쌓은 것이 악한 것뿐이라 한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5) 독사의 자식들이라 함은 세례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고 메시야가 오심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거역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 거역함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보고도 부인함을 말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여 도덕적인 말을 한다. 너희들이 도덕적인 말을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구원의 영생이 없는 것은 헛된 말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그리고 저들이 한 말대로 심판을 받아야 함을 경고한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보응의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

생명의 말씀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마 12: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마 12:16)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신 것을 알리지 말라 하셨다. 그 이유는 그가 행하신 치유 기적으로 많은 대중들을 흥분시킬 수 있고 또한 적대자들에게는 더욱 반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야 한다. 메시야직을 온전히 감당하시어 부활하신 후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러시면서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사야의 글을 통하여 전한다. 이사야는 메시야를 고난받는 종으로 예언을 하였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사야의 글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택한 종임을 전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전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바리새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기름을 부음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음을 알리고 있다.  그것에 대한 증거가 하나님의 성령을 주셨다는 것이다. ”보라 태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마 12:18) 즉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다 함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과 사역을 펼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심판이라는 것이다. 심판의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복음을 땅끝까지 이르게 하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이와 같은 복음을 전하시는데 다투지 아니하고 소리를 지르지도 아니하시고 온유와 겸손으로 행하신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생명의 말씀 “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릴 것이니”(민 28:9)

  “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릴 것이니”(민 28:9)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받으실 때에 양을 태워드리는 제사만을 받지 않으신다. 즉 제물과 함께 소제와 전제를 함께 받으신다는 것이다. 소제는 곡식을 빻은 가루로 드린다. 곡식을 고운 가루로 빻는 것은 하나님께 나가는 자가 철저히 부서진 자아를 상징한다.  고운 가루에 감람나무 기름을 섞어서 불에 태워 드리려 한다. 감람나무 기름을 섞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제는 포도주를 제물에 붓는 것으로 마치 자신의 생명과 피를 드리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숫양 두 마리를 번제로 드려야 안식일에 드리는 제사가 된다. 소제와 번제는 따로 독립된 제사가 아니라 상번제와 안식일에 양으로 번제를 드릴 때에 함께 드려야 한다. 안식일의 제사법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이 무엇인가? 드려야할 제물이 있어야 하고 드리는 자의 믿음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신자들이 드리는 주일날 예배는 어떠한 믿음으로 드려야 하는가? 흠과 점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 되시고 드리는 자의 믿음이 더하여야 한다. 드리는 자의 믿음이란? 소제를 드리는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철저한 회개로 드려야 하고, 전제로 드려야 하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과 피를 드려야 한다. 즉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드려야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물과 전체로 드리는 제사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을 행하고 그 행위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 12:3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이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제물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드리는 자의 믿음과 헌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