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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6) ‘헐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 자에게’ 평안히 가라 하는 인사는 무의미한 것이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약 2:15)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배부르게 하라는 말은 가치가 없는 공허한 말이다. 또한 입을 옷이 없는 자에게 옷을 입어서 몸을 따스하게 하라는 것도 합당치 않는 말이다. 오히려 말만 함으로서 더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다. 부자가 되어 도와줄 수 있는 자가 도와주지 않음은 위선이라 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진실된 믿음의 열매는 행함으로 나타난다. 행함은 믿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행함이라는 열매가 없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음을 말한다. 마치 나무에 꽃이나 열매가 없다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죽은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자기도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도 구원시키지 못한다. 믿음과 행함은 분리 시킬 수가 없다. 왜냐하면 행함은 믿음으로부터 온 열매이기 때문이다. 즉 입술로만 고백한다고 해서 그 믿음의 실체를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하여야 할 것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실체를 입증하기 위한 행위라는 것이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구원하는 참된 믿음은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고 외적으로는 믿음에 대한 행함으로 나타낸다. 그렇게 하여야 하나님의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며, 믿음이 없이 행함을 올바른 행함이 아니다. 온전한 믿음이라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거듭남의 역사가 있어야 하고 행함이 수반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의 삶이 힘드시더라고 천국의 소망을 가지셔야 합니다. 천...

생명의 말씀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거짓 믿음은 전혀 가치가 없는 거짓이며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러나 참 믿음은 거듭남에 수반함으로 이전과는 다르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행동에 변화를 준다는 것이다. 새롭게 태어났음을 말한다. 이전에는 마귀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그래서 주인의 말과 손짓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거듭남의 역사 속에는 말씀을 따라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특별한 은혜가 임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말로만 하고 행함이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 자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행함이 없이 말로만 하는 믿음은 그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이라 한다. 마귀들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 떠든다. 그러나 마귀를 말로만 하나님을 찬양하지 그분의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로만 떠들고 행함이 없는 자들은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된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믿음에는 행함이 이었다. 하나님을 믿기에 아들을 바치라 할 때에 행함으로 아들을 제단에 올렸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믿음을 증명받기 위해서는 행함이 함께 있어야 한다. 행함이 함께 있으므로 의인이라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것이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 여기서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울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고 야고보는 거듭남의 은혜가 있었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안에는 행위 언약이 함...

생명의 말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몹시 싫어하신다. 왜 그런가 하면 가난한 자를 택하여 부요하게 하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기 때문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 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율법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이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것이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 2:8) 만일 사람을 차별하게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가 된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9)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로 사망을 이긴 것과 같음을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하여 확인하는 것은 가난한 자에게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베푼 자에게 여호와께서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들은 심판의 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함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난한 자들을 행한 긍휼의 마음을 가진 자들은 심판대 앞에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며 심판도 그 긍휼을 이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자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이웃을...

생명의 말씀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그의 영광을 입은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영광이다. 그래서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임한 자는 아버지의 성품을 닮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고후 3:18)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이 당연히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에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긍휼이 있다. 이와 같은 성품을 가진 신자라면 사람을 차별하거나 업신여길 수 없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하나님의 사랑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자에게 찾아오신 은혜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차별하여 대우를 한다면 심각한 일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그리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11) 사랑하는 성도여...

생명의 말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하나님 아버지는 거룩하신 분이다. 그래서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거룩한 백성이라 함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는 것이다.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10) 이것은 경건의 삶을 내면적인 모습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외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내야 한다. 즉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함을 말한다. 야고보서의 배경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갈등이 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특히 부자들은 이웃을 배려하는데 힘을 써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이웃을 구제하는 일은 나중에 천국에서 상급을 받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세속이란 세상에 속한 죄악을 말한다. 세상의 자랑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자랑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의 의를 지키며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결론으로 말씀을 정리하자면 경건한 자의 삶은 이웃과 자기의 거룩한 생활과의 관계를 불가분의 관계...

생명의 말씀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사람이 분노를 발할 때에 가장 극에 달하는 것이 가까이 지내던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낄 때이다. 그때에 속에서 나오는 외침은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 이다. 그것은 말로도 또는 행동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박해를 피하여 이방나라에 와서 동족끼리 함께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데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어렵고 힘이 들때에는 형제요 자매이며 하다가 갑자기 분위기 바뀌어 냉랭해 진 것이다. 그 이유는 빈부의 격차가 생겼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생겨났다. 부자들은 교만하여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였다.  먼저 부자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전한다. 인생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풀과 같다는 것이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약 1:11) 이에 가난한 자들에게도 말씀이 이어진다. 교만한 자들이 화를 나게 하고 분을 발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죄악에 빠지지 말라 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암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즉 억울함을 당하였다고 해서 분을 발하거나 성질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억울함을 당하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만일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 죄가 됨을 말한다. 그래서 주시는 말씀이다. 어떠한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성질부리지 말라 하신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본문에서 전하고자 하는 말씀은 이러하다. 억울하게 고난과 핍박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를 배우고 지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

생명의 말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사람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환난을 당하면 당황하게 된다. 그때에 사람의 이성으로 판단을 하게 되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홧김에‘라는 단어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만큼 사람의 생각은 충동적이고 불완전함을 말한다. 이것은 죄로 타락한 자들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성품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 그러므로 사람이 온전한 길을 택하기 위해서는 오직 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 18:19)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함은 피조물들에게 다정하시며 포용하시어 진리로 인도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분이 말씀하신 것은 다 진리가 된다. 고난과 환란 가운데 있을 때에 오직 피할 길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것에 대하여 사도바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에 탈출을 위한 기도나 지혜를 구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능력을 맛보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죽이고 말씀을 따랐다. 억울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내와 오래참음으로 간수를 대하였더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때에 간수가 바울의 착한행실을 보고 나도 어떻게 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그 유명한 성경구절이 등장한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 16:31) 사랑하는 성...

생명의 말씀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니”(마 8: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니”(마 8:16)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 또한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자신이 하셨던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승천하셨다. 예수님에게 명령과 분부함을 받은 제자들은 어떻게 사역을 하였는가? 바울의 예로 살펴보려 한다. 바울도 죽은 자를 살렸다. 드로아에서 설교할 때에 창문에 걸터앉아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렸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행 20:10) 또한 구브로에서는 마술사 엘루마를 맹인으로 만들고, 루스드라에서는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고, 빌립보에서는 귀신들린 여종을 고치고, 에베소에서는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 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멜레데 섬에서는 독사에게 물려도 살았고, 이질에 걸린 사람도 고쳤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서 이러한 일들을 자랑하지 않았다. 이렇게 이적을 행하였지만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였다. 오히려 자신의 몸에 질병이 있음을 감사하였다.  여기서 생각을 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무엇을 전하였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이방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은혜를 전하였고 그분과 화목한 자로서 이방사람들 앞에 섰다. 바울은 감옥에 있든지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어서도 말씀에 순종하였다. 악인들에게 억울한 누명과 대접을 받을 때에도 더러운 것들의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다. 감옥에서 간수들을 향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기도하며 찬송을 하니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옥문이 열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도들의 사역에서 보듯이 병 고침의 은혜를 전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생명의 말씀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믿느냐이다. 유대교는 아직도 아론의 후손이 대제사장직을 담당한다고 믿고 있고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대제사장 직분을 담당하신다고 믿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죄를 속량하여 주셨다. 그런데 그분께서 속죄사역의 성격은 구약의 대제사장이 하였던 것을 완전케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의 역할과 희생제물이 중요하다. 두 요소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이시면서 죄가 없고 흠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시므로 예배에 바른 중재자가 되신다. 또한 짐승의 제물로 흠이나 부족한 것이 있게 되면 온전한 제물이 아니다. 그런데 흠이 없고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제물이 온전한 제물이 된다. 구약에 속죄제사는 죄인의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어린양을 번제단 앞에서 잡아 피를 들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 휘장에 일곱 번 뿌리고 내장과 기름을 불에 태운다. 그리고 짐승의 가죽과 몸은 진영 밖으로 가지고가 재 버리는 곳에서 태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는 속죄제사를 완전케 하는 은혜가 있다. 그분은 성전 안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채찍으로 맞아 피를 흘렸다. 그리고 진영 밖 재 버리는 곳에 태움을 당하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 위로 가신 것이다. 이것에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계시를 성취하시고 그 은혜를 택함을 받은 백성들에게 값없이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여야 할 일은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찬양하는 일에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생명의 말씀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본문의 말씀은 운동경기 중에서 마라톤을 생각하며 비유를 하고 있다. 즉 이 땅에서의 삶을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주자들이 있으며 이미 결승점을 통과하여 영광의 면류관을 쓴 자들이 허다하게 많다는 것이다. 정처없이 떠도는 사람을 나그네라 한다. 그런데 목적지를 향하여 묵묵히 가는 자를 순례자라 부른다. 신자들이 믿음생활을 하면서 목적지에 대한 방향과 감각이 없다면 심각한 일이다. 이것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결승점을 향한 길을 이탈하여 무작정 달려가는 것과 같다. 운동선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인지하고 달려야 한다. 그래야 헛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적지를 향하여 달리는데 있어서 불필요한 것과 무거운 짐들이 있다. 그러한 것을 짊어지고 달리게 되면 고생고생하게 된다. 즉 목적지에는 영광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그것에 대한 가치를 안다면 경주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과감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영광의 면류관을 향하여 달리는데 있어서 두 가지를 버려야 한다. 첫째는 무거운 짐이다. 세상의 부이다. 화폐나 금덩어리와 세상에 애착을 가져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들이다. 두 번째는 얽매이기 쉬운 죄이다. 달리는 가운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다. 주변에서 들여오는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수많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인내하며 경주하여야 한다. 경주하는 자가 고난을 참으며 인내하기 위해서는 약속된 영광이 얼마나 큰지를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중간에 달리다가 포기하는 자들을 싫어하신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노빠꾸입니다. 하나님은 주저 앉거나 뒤로 후퇴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여러분...

생명의 말씀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막 1: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막 1:40)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내게로 오라 하셨다. 그러면 너희 짐을 가볍지고 쉴 수 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능력과 권위가 있으시다. 그렇다면 병자에게는 어떠한 것이 필요한가? 믿음이다. 복음서에서 병고침을 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분의 능력을 믿고 믿음을 고백을 한다. 오늘 본문에서 둥장하는 나병환자도 주님께서는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믿고 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가? 약속의 말씀을 깊이 묵상을 하여야 한다. 나병환자나 맹인 바디메오나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셔야 한다. 이사야의 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죄를 사하여 줄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어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온 것이다. 즉 나를 구원하러 오셨다. 병든 자를 위하여 오셨음을 믿고 나와야 한다. 모든 병자라고 할 때에 육체의 질병이나 영혼의 문제가 있는 것을 말한다. 그 구원 사역을 예수님이 원하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막 1:41) 그러므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기뻐하신다. 달리 말하면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셔야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 앞에 죄를 고하거나 병든 것을 고백하는 것을 몹시 부끄러워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부끄워 하실...

생명의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2) 예수님를 따르던 한 사람이 자기의 부친을 먼저 장사하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제자가 되려면 세상의 일보다 먼저 복음 선교 사역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도덕과 윤리를 무시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교리사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령의 생명의 법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제자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함을 말씀하시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의 복음에 관심이 없는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라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2) 그러므로 나를 따르는 제자들아 세상의 일에 관심을 두거나 짐을 지지 말고 자유롭게 복음전도에 힘쓰라는 말씀이다.  부름을 받은 제자들이 세상 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무엇을 우선시 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도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하늘 아버지의 영광과 뜻을 먼저 구하라 하셨다. 그리고 우리들의 간구를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즉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뜻을 구하여야 한다. 하루의 시작을 새벽예배로 하고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기도로 시작하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의 믿음이나 삶에서 가장 먼저 하여야 할 일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신자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의 ...

생명의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많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으시고, 모든 병자를 고치셨다. 이러한 일이 있을 때에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분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예수의 제자가 되겠고 한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마 8:19)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는 길은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함께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즉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고 제자들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함으로 안식처가 없는 나그네이며 방랑자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한다.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심을 말하여 신성을 나타낸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가난한 자로 오셔서 온 인류에게 충만한 안식과 부를 제공해 주신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이 말씀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셔서 죄인들의 대속물이 되기 위함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왜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야 하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예수 안에는 생명의 법칙이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죽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라면 예수 안에는 생명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법칙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

생명의 말씀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야고보서를 묵상하다보면 행위를 많이 강조한다.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와 반대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의를 전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야고보가 주장하는 것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신칭의를 더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를 전가받아 구원을 받았으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즉 하나님의 구원에는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함께 함을 말한다. 하나님을 믿었던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말씀하신다.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는 것이다. 아예 구원이 임한 적이 없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예수 그리스도는 새언약을 성취하셨다. 성취하신 것에는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약속과 능력을 주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의 공동체 안에 세속적인 것들...

생명의 말씀 "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맡겨진 자들이니라”(민 3:9)

  “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맡겨진 자들이니라”(민 3:9)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조사를 하라 하셨다. 그런데 레위 지파의 수는 세지 말라 한다. “너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라”(민 2:49) 그러시면서 그들에게는 성막에 관한 일을 맡기게 하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증거의 성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라 그들은 그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성막 주위에 진을 칠지며”(민 2:50) 또 말씀하시기를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모든 맏이를 대신하여 내것이라 하셨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맏이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민 3:12)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열두 지파 가운데 무엇 때문에 레위 지파를 택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두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 갔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보이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리의 하나님이라 하며 예배를 드리고 뛰어 놀았다. 이 광경을 보았던 모세는 성질에 두 돌판을 던져 깨트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편에 있는 자들은 나아오라 한다.  그때에 레위 자손이 다 모여 모세에게로 나갔다. 모세가 명령하기를 우상숭배를 한 자들은 그 형제와 친구를 막론하고 죽이라 한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출 32:27) 레위 사람들은 모세의 지시를 따라 삼천 명가량을 죽였다.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출 32:28) 즉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와...

생명의 말씀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계수된 자니 모든 진영의 군인 곧 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삼천오백오십 명이며”(민 2:32)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계수된 자니 모든 진영의 군인 곧 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삼천오백오십 명이며”(민 2:32) 민수기를 통하여 확인하는 것은 광야에서 훈련과 시험을 거쳐야 가나안에 들어간다. 즉 하나님이 인도하셔야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심성이 부패한 존재이므로 여호와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민수기의 말씀이 존재한다. 칼빈의 교리 가운데 전적인 부패가 있다. 무슨 말인가하면 사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 바른 믿음은 인간의 무능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야함을 배운다. 왜 그런가 하면 구원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함을 받은 백성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감사하고 인내하며 용기를 갖아야 한다. 시련과 훈련을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하기 위함이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민수기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여야 할 것은 우리 안에 반역의 기질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다. 가나안과 천국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함을 깨달아서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 즉 인간의 반역의 기질이 순종으로 바뀌게 끔 훈련과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광야 1세대가 가나안 입성에 실패를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광야 2세대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면 훈련과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인내와 오래참음으로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이 우리들에게 교훈의 거울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