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13의 게시물 표시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II

잡곡밥에 된장국과 반찬 세 가지로 차려진 밥상의 가격이 천원이라고 한다 . 아무리 계산을 하여 남는 장사가 아니라 밑지는 장사이다 . 여기에 점포 월세와 전기 , 수도 세금까지 지불을 하면 ,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 그래도 주인은 고집스럽게 2 년 동안이나 장사를 하였다 .   배고프고 식사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하였다 . 그런데 천원을 받는 이유가 있었다 . 먹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먹으라는 뜻이다 . 무료 급식소를 가면 당당함을 주장하지 못하지만 , 밥값 천원을 내면 기를 펴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천원의 식당이 운영될 수 있는 데는 , 보이지 않는 후원자들이 있었다 . 작은 것들이지만 정성껏 도와주는 자들이다 . 그들을 찾아가 사실을 확인하지만 그들은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 자기들은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다 .   그동안 천원의 식당을 운영하시던 분이 건강이 안 좋아서 일 년 동안이나 문을 닫았었다 . 그런데 식당에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 . 전 주인의 뜻을 따라 밥상을 차릴 것이라 한다 . 이 사연을 TV 에서 보는 동안에 가슴이 뭉클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   하나님이 죄인이나 신자들이게 값없이 주는 것을 은혜라고 한다 . 그런데 은혜는 마음에 주입이 되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고 행동을 유발하게 한다 . 이것을 교리적인 설명으로 유효적인 부르심이라 한다 .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임한 자에게는 구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함이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신 이유가 선하고 거룩한 자가 되어 선한행실을 하기 위함이다 . 그러니 참된 은혜를 받은 자는 선한 행실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자들의 선한 행실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   사람이 움직이고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건강하여야 한다 . 신자들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터넷이 널리 퍼져 편리한 것이 많다 . 그러다보니 얼굴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익명으로 대화하는 공간까지 생겨났다 . 크리스천 모임에 대하여 말을 하고자 한다 .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룩하지 않은 방법으로 대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이 다르면 즉각 응징에 들어간다 . 그런데 정죄와 비판의 수준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다 . 거룩한 말씀을 모르는 사람과 다름이 없다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입은 자들은 겸손하다 . 겸손이라 함은 하나님 앞과 이웃 앞에서 겸손한 것을 말한다 . 인간이라는 존재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 하나님의 사랑과 신자가 알고 있는 사랑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 그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자처럼 , 마치 하나님과 동등한 자처럼 행하면 마귀가 되는 것이다 . 귀신도 하나님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께 겸손한 자가 아니다 . 오히려 하나님과 동등하려 하였던 자이다 .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겸손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이다 .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이루시게 위하여 일을 하실 때에 겸손을 나타내셨다 . 그리고 겸손한 자에게 사랑을 베푸시게 때문이다 .   그러므로 겸손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이다 . 하나님을 알고는 있지만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이다 . 이 겸손의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 .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   겸손은 하나님을 아는 사랑의 열매이다 . 열매가 없는 자는 귀신과 같은 자이다 . 귀신도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 그러나 두려움에 대한 순종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 법 없이도 살 사람 ’ ‘ 천국에 가야할 사람 ’ 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다 . 왜냐하면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었다 .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 심지어 배척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 배척하는 자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   저들은 자기들의 수고와 율법을 지킴으로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 그러나 능동적으로 열심히 일을 하다가 지칠 정도가 되었지만 얻은 것이 없었다 .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다 . 또한 율법을 지키고 깨달을수록 오히려 죄가 더 드러나게 됨으로 인하여 마음의 짐은 점점 무거워지게 되었다 .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너희가 스스로 고생과 수고를 하여도 쉼을 얻지 못한다 .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 “ 쉼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야 한다 .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라고 하셨다 .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아 , 나를 부인하면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한다 . 나를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이라 영접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구세주로 고백을 하라 .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 너희를 위한 것이다 .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을 하면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 너희의 것이 된다 . 이것을 너희에게 주러 내가 이 세상에 왔노라 . 그러니 “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하셨다 .   내 멍에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어...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흔히들 인생사가 먹고사는 문제라고 한다 .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에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갈등이 있다 . 좋아서 만나는 사람이 있고 , 어쩔 수 없어도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다 . 이것을 아주 쉽게 생각을 하면 보기 싫은 사람은 안 보면 된다고 하지만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   인생사의 갈등의 문제가 꼭 다른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주어야 생기지 않는다 . 그 가운데 하나가 시기하는 것이다 . 나보다 똑똑해도 안 되고 , 나보다 더 부요해도 아니 된다 . 나보다 잘나고 , 나보다 더 잘살면 배가 아프고 질투가 난다 .   그래서 아내가 동창회를 다녀오면 기분이 좋지 않다 . 그리고 불똥이 집식구들에게 특히 남편에게 향하게 된다 . 이유인즉 옛날에는 나보다 공부도 못했고 못생겼었는데 지금은 신수가 훤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사람의 질투는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문제에서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생각하는 가치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 더 나아가 생각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온유한 마음을 나타내어야 한다 .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들을 위하여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 아들보다 귀한 것은 없다 . 아들을 내어 주시고 죄인들의 죄값을 치루신 것이다 . 이 십자가의 사랑을 안다면 질투를 생각할 수가 없다 .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한 근원에서 나왔다 . 즉 십자가의 사랑이다 .   십자가의 사랑은 죄인을 위하여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 그리스도인은 같은 사랑을 갖고 있다 . 같은 사랑을 갖고 있는데 시기와 질투는 생각할 수 없다 .   인생사의 문제는 내 생각으로 역사를 만들려 하는데 있다 . 이것을 축소하면 공동체에서 , 친구들 간에 ,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이루려 하니 ,...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 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사람들이 겪고 있는 갈등의 속을 들여다보면 ‘ 무언가에 대하여 쓸쓸함 ’ 때문이다 . 나를 위하여 , 나에게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는데 현실의 상황은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남으로 인한 섭섭함이다 . 이러한 이야기가 신문 지상에 가득차 있다 .   간절한 사랑했던 이가 쓸쓸함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생기고 , 신뢰가 깨진 가족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 목사들 간에 생긴 분쟁의 이야기가 있다 .   개인은 각 자의 개성을 갖고 있지만 ,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 . 개인의 인격체를 세우기 위한 자존감 , 자존심을 갖고 있다 . 개인이라는 존재가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지녀야 하고 또한 다른 이에게도 유익한 존재가 되기 위함이다 .   그런데 특히 쓸쓸함을 많이 느끼거나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자들이다 .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으로 되어 가야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내 목소리가 커야 한다 .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귄위에 대한 순종이다 . 부모의 명령에 순복하는 것이다 . 부모가 어린 아이를 훈계할 때에 ‘ 하라 ‘ '말라 ’ 를 가르친다 . 아직 이성적인 판단이 없을 때이다 . 이것은 누구의 명령을 받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어린아이 시절 때에 배우게 된다 .   그런데 놀라운 것이 , 이 권위를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권위에 대한 순종이 없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람은 귄위에 대하여 배움이 있어야 한다 .   권위에 대하여 배움이 있으면 ,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 ,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 그리고 사람이 어떠한 존재를 인지를 알 수 있다 . 그렇게 되면 ‘ 그 쓸쓸함에 대하여 ’ 를 해결할 수 있다 .   사람이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 . 부패한 성품에서 나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어제는 켈리포니아주에 있는 Carmel Beach 를 다녀왔다 . 그곳에서 다람쥐를 보았다 . 모래 숲에서 살고 있는 다람쥐인데 어린아이들이 던져 주는 빵조각에 경계심을 풀고 다가오는 것이었다 . 그것도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왔다 .   자연에서 야생으로 살아야할 다람쥐가 모래밭 숲속에서 살고 있다 . 그곳에는 다람쥐가 좋아하는 도토리나 열매가 없는 곳이다 . 다람쥐가 먹는 것은 빵부스러기이다 . 야생 다람쥐의 모양은 갖고 있었으나 근성은 잃어버린 것이다 .   Carmel Beach 는 관광지이다 . 그러다보니 자연히 사람들의 발길이 많다가 보니 일어난 일이다 . 다람쥐는 도토리나 각종 열매를 먹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빵을 받아먹기 시작을 한 것이다 . 이 모습을 보면서 신자들의 삶에 대하여 생각을 하였다 .   성경 말씀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음을 책망하고 있다 . 외모로는 신자로서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 직분의 호칭도 있고 , 정장 양복에 성경책도 손에 쥐고 있거나 차 안에 유리창 앞에 놓여 있고 , 예배도 참석하고 있다 .   그런데 신자로서의 근성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 신자는 무엇으로 살고 ,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를 모른다 . 신자가 먹어야할 영적인 음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 먹는 것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다 . 다람쥐의 먹이는 사람이 주는 빵조각이 아니다 . 다람쥐가 , 다람쥐가 되기 위해서는 도토리를 먹어야 한다 .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그들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다 . 먼저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를 위함이다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 . 아들에는 맏아들과 탕자와 같은 두 부류가 있다 . 맏아들처럼 아버지의 일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 그러면 아버지의 것이 맏아들의 것이 된다 .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탕자처럼 기도를 하고 ...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사람은 어떠한 환경이 다가오더라도 살게끔 되는 것 같다 . 어제는 San Francisco 시내를 돌아 봤다 . 언덕 위에 지은 집들을 보고 놀랐다 . 언덕도 보통 언덕이 아니다 . 더 놀라운 것은 자동차가 올라가고 또한 파킹까지 한다는 것이다 .   마치 놀이동산에서 즐길 수 있는 긴장감과 공포감이 느꼈다 . 그런데 그런 집들이 언덕마다 지어졌고 , 집값은 만만치 않다 . 그리고 San Francisco 에 관광을 오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서 보고 체험하여 보고 가야 한다 .   사실 이 언덕 위에 지어진 집들에 대해서는 이미 주변에 있는 친지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이다 . 듣기는 들었지만 공감하기는 쉽지 않았다 . 그런데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체험을 하니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   신자들의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 성경은 관념이나 사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 역사적인 사실이며 , 그 역사를 주관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를 주관하신다 . 그리고 역사를 주관하시되 미리 계시함으로 이루신다 .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십자가의 구속사이다 . 오실 메시야 오신 메시야 , 그리고 다시 오실 메시야의 말씀이다 .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증거이다 . 순종과 불순종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결과에 대한 것이다 . 그러니 신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 동일하신 하나님이 동일하게 역사하심으로 오늘 신자들에게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성경 속에 등장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이다 . 왜냐하면 동일한 은혜로서 같은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신자들의 믿음은 눈으로 보고 , 듣고 , 만져본 바 된 것이다 . 그러니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이야기 전하듯 전하면 아니 된다 . 올바른 신자라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나의 믿음의 고백으로 전하여...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를 안 믿는 것도 문제이지만 , 예수를 잘 못 믿는 것도 큰 문제이다 . 왜냐하면 가짜 예수를 전하는 곳도 많고 , 자칭 예수라 하는 자들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 이전에는 교주에게 맹신을 강요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 오히려 성경의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을 한다 .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요한도 잠깐 의문을 가졌었다 . 그는 회개의 세례를 받고 메시야를 맞이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불의한 자들이 심판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했었다 . 그래서 옥에 갇혀 있던 세례요한은 그의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어 질문을 하였다 .   예수님이 당신이 오실 그이가 맞습니까 ?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 예수님의 대답은 이사야의 글에서 말씀하셨다 . 메시야가 오면 포로된 자들이 자유를 얻고 병자와 눈 먼 자가 고침을 받을 것이다 . 그리고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으니 듣고 본 것을 세례요한에게 전하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셨다 .   지금도 예수를 믿되 자신의 생각과 고집으로 믿는 자들이 많다 . 내가 생각하는 예수를 이럴 것이라 한다 . 이러한 것들에 대한 오해를 정리하기 위해서 신자들은 신앙고백을 한다 . 신자들이 믿는 예수는 동정녀 몸에서 태어난 분이어야 한다 . 즉 처녀에게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 땅에는 자칭 예수라 하는 자들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짜이다 . 그리고 신자들이 믿고 있는 예수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 가짜들은 이미 이 땅에 와 있다고 주장을 한다 .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게 되면 죄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되고 죄인과 의인을 구별한다 .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이 이미 오신 초림의 때 에와 다시 오실 재림의 때가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 있다 . 초림의 때에는 구원을 받을 때이다 . 그리고 재림의 때는 심판이다 .   이러한 것이 성경의 말씀 속에서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