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을 잃어버린 교리, 십자가로 만나는 참된 화목(욥 22:3)
긍휼을 잃어버린 교리, 십자가로 만나는 참된 화목(욥 22: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욥 22:3)
사람이 말싸움을 하다가 논리로 이기지 못하면 억지를 부리기 마련입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인과응보’라는 원론적인 신학을 가지고 끊임없이 욥을 공격했지만, 욥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에서는 엘리바스가 욥이 짓지도 않은 죄목들을 완전히 날조하여 기소하는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이것은 철저히 굳어버린 '교리의 틀'에 갇힌 결과입니다. 엘리바스의 머릿속에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그런데 욥은 지금 끔찍한 벌을 받았다, 고로 욥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끔찍한 죄인임이 틀림없다"는 비정한 공식만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엘리바스는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고 의롭다 한들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나 기쁨이 되겠냐고 반문합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경건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신 초연한 분이라는 주장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평생 빈민을 구제하며 살았던 욥을 향해,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고아의 팔을 꺾은 악질 자본가라며 사실을 왜곡합니다(욥 22:9).
욥의 엄청난 악행 때문에 올무와 두려움, 어둠과 재난이 임했다며 그를 악인의 길을 따르는 자로 낙인찍어 버립니다. 그러고는 짐짓 엄숙하게 권면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하나님의 사랑을 지워버린 흉기 같은 신학
그러나 엘리바스의 신학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길이 필요 없을 만큼 초월적인 분이시지만, 동시에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와 약속 안에서 성도들의 작은 순종과 경건을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초월성’만 강조하느라, 인간 역사 속에 찾아오셔서 아파하시는 ‘내재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엘리바스의 말처럼 차가운 분이 아닙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사 42:3)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잃어버린 신학은 결국 메마른 교권주의로 전락하여, 사실을 왜곡하고 형제의 가슴을 찌르는 무서운 흉기가 될 뿐입니다.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긍휼로 얻는 위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욥기를 통해 사람의 말로는 결코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없으며, 오히려 상처만 더 깊어질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끔 교회에 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사람의 위로와 인정, 사람의 사랑을 채우려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며 영적인 착각입니다. 상처 입은 죄인은 오직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긍휼하심으로만 치유되고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엘리바스가 말한 회개는 기복주의적 성격이 짙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이 땅에서 물질의 복을 짜내기 위한 수단이나 조건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다시 화목하게 만들어 가시는 ‘믿음의 선물’입니다.
십자가로 완성된 영원한 화목
하나님은 율법의 공식으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우리와 화목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어주셨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5:10)
인간의 비정한 정죄와 얄팍한 인과응보의 세상 속에서 마음을 다치셨습니까? 사람의 말에 기대지 말고, 우리를 위해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과 온전한 화목을 누리며, 그분의 긍휼 안에서 참된 평안과 위로를 경험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엘파소열린문장로교회 장용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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