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데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데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예수 그리스도 앞에 부자 청년이 등장을 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다. 천국은 재물로나 선한 일을 통하여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베드로는 즉각 예수님께 질문을 한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데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무슨 일에든지 열심히 하였다. 그러다보니 보상의 심리가 컸다. 즉 자신의 열심히 행한 것으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러하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영광의 보좌에 제자들이 함께 앉아 열두 보좌를 심판할 것이라 한다. 그리고 부모와 처자식을 뒤로하고 밭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보상으로는 더 많은 부모를 얻을 것이며 여러 배의 보상을 받고 영생을 상속하는 은혜를 주신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이 말씀을 해석을 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이미 아버지의 집인 교회를 가지고 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집이다. 그리고 영적인 부모인 장로님, 권사님들이 있고 그리스도의 피를 나는 믿음의 형제와 자매가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행실을 통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 있다. 즉 적극적인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만나셨다. 그리고는 질문하시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셨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니 네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베드로는 모든 일에 열심...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다. 즉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께 의존적인 곳이고 세상나라와는 달리 겸손하며 섬기는 자가 큰 자인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는 천국은 어떻게 들어가는가를 말씀하신다. 부자청년의 질문은 이러하다 어떠한 선행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 이 청년은 자신이 율법을 지키었다고 한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마 19:20) 그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청년에게 이르기를 네 소유를 팔아 나누어 준 후에 나를 따르라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이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을 하며 돌아간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어렵다고 한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 예수님께 질문을 한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냐는 것이다.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니까”(마 19:25)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말한다. 그리고 청년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야 영생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런데 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해결이 되었다. 즉 율법으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얻은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임을 자랑하고 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하나님의 의를 받은 자라야 거룩한 자가 됨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의를 받은 자들은 그의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즉 율법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얻은 자만이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그러므로 율법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특성과 거룩하심을 깨닫고 지키는 자가 된다.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것이다. 또한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도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사랑하신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삼상 11:6)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삼상 11:6)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정정치를 거부하고 왕정정치를 택한 것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패역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여 주신다.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은 사사 입다가 활동할 때에 암몬 사람들은 크게 패한 적이 있었다. 암몬 사람들은 보복하기 위하여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을 쳤다. 그런데 길르앗 사람들은 암몬 사람 나하스에게 화친을 한다. 즉 항복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나하스가 요구하기를 길르앗 사람들이 오른 눈을 다 빼야 화친을 하겠다고 한다. 그러자 길르앗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말미를 달라고 한다. 이 소식을 사울 왕이 들었다. 이때에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므로 인하여 전쟁이 시작된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삼상 11:6) 그래서 한 겨리의 소를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전쟁에 나오라 한다. 만일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의 소들을 각을 뜨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인 전쟁에 나갈 수가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다. 사울 왕은 이스라엘 군대를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에 들어가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란들을 쳤다.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삼상 11:11) 전쟁에 승리한 사울과 백성들은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며 기뻐한다. 즉 패역한 백성들에게 생명을 구원하여 주시며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길르앗 사람들은 용사라 불리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약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동족 간에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 기브아 사람들 간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길르앗 사람들을 죽였기 때...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삼상 10:17)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삼상 10:17) 미스바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장소이다. 백성들이 그곳에 모여 회개하며 번제를 드릴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셨다.  이 장소에서 사울을 왕으로 뽑는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삼상 10:18)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그러므로 왕정정치는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사람을 섬기겠음을 말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사람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말한다. 그런데 자기의 고집으로 권력을 누리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정치가들이나 평론가들의 말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의 지혜를 기준으로 삼고 권력자의 성공과 실패를 들먹이며 말한다. 그런데 정치의 권력을 잡고 성공하여 영원토록 권세를 누린 자가 있는가? 지금도 나라들마다 권력을 잡으려고 수단과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다. 거짓과 술수로 선동질하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 말에 동요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 그 나라의 왕은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 왕은 영원하신 분이다.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신정정치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정 정치를 원하였다. 그래서 왕정 정치의 역사가 열왕기 상하의 기록이다. 결국에는 왕정 정치는 실패로 끝이 났다. 사람이 잡은 권세로는 나라의 평안과 안식을 유지할 수 없고 영원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내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삼상 9:16)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내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삼상 9:16) 여호와를 떠난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그 고통 소리를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기업의 지도자로 삼는다. 사람의 조건으로 볼 때에 좋은 사람이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켰더라”(삼상 9:2) 이제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게 된다. 사울은 사람의 마음에 좋은 자라면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이다. 왕정 정치를 통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을 왕으로 하는 나라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그 나라를 잘 보여는 왕이 다윗이며 다윗 왕국이다. 또 하나 확인하는 것은 사람의 발걸음을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사울은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으러 나셨다가 선지자 사무엘을 만난다.  아버지의 암나귀를 어떻게 찾을까 하여 선지자를 찾았다. 그래서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준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의 왕을 삼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지도자로 삼았다고 한 것이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삼상 10:1)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 앞에 출입하지 자가 아닌 권력을 잡은 자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지 아니하므로 결국에는 하나님을 떠난 자가 된 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순종을 할 것인가 아니면 권력을 잡은 자로서 힘으로 살 것인가 ...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여호와께 기도하매”(삼상 8: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여호와께 기도하매”(삼상 8:6) 사무엘이 통치하는 동안에 블레셋의 침입이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기를 보냈다. 그런데 사무엘이 나이가 많아 늙고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처럼 행위가 바르지 않았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삼상 8:3) 이에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 사무엘에게 나아가 왕을 달라고 한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나라들처럼 왕을 달라고 했을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사는 것은 순종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왕의 정치는 권력의 힘을 갖는다. 그래서 나라가 부강해 지면 왕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들의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으로 얻겠다는 것이다. 또한 날마다 회개의 자리로 나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겸손과 온유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힘으로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마음이다. 그 말을 들은 사무엘은 여호와꼐 기도를 한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여호와께 기도하매”(삼상 8:6) 여호와의 대답은 그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우라 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뒤로하고 자신들의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다.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삼상 8:8) 사무엘은 왕의 제도를 가르친다. 신정정치(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에서는 맏아들을 대신 하여 레위인을 세웠다. 그러나 왕의 정치에서는 맏아들을 왕에게 바치고 전쟁에 나가야 한다. ...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의 관계는 ’갑‘과 ’을‘로 형성이 되어 있다. 그래서 ’갑‘의 일방적인 횡포에도 ’을‘은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설령 ’을‘이 잘못을 하여서 용서를 빌어도 ’갑‘이 용서를 해주지 않으면 그 관계는 풀리지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갑‘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면 용서를 해 주어야 하는 것은 의무가 된다. 하나님의 속성은 남을 용서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을‘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용서를 해달라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용서의 권리는 은혜의 도움이 필요함을 요구하는 것이 된다. 즉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은혜가 필요함을 호소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갑‘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의무로 용서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법칙인데 명령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할 의무 사항이다. 만일 이 법칙을 따르지 않거나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이방인이요 세리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들이 아직 죄가운데 있을 때에 찾아온 것이다. 이 속성으로 소자를 찾아가야 한다. 그래서 용서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의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그의 명령과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용서와 구제의 선행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나의 잘남으로 용서를 하거나 구제를 하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가 이 작은 ...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 18:33)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질문을 하면서 시작이 된다. 주여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를 해주어야 합니까? 이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베드로의 질문에서 내 형제라고 하였다. 형제라고 함은 같은 피로 속죄를 받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결된 것을 말한다. 히브리 사상에서는 이웃을 같은 사상을 가진 형제, 자매라는 개념이 없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안에서 형제이며 자매라는 것이다. 이제 그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가 있는데 그곳에서 범죄함이 일어나면 어떻게 용서를 해야 함을 묻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안에는 용서에 대한 법이 있다. 용서를 해주어야 하는 의무와 용서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금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으므로 다시 탕감이 취소되고 옥에 갇히게 되는 비유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의 속성은 남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도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받지 못한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은혜를 받으면 용서의 자리에 함께 하게 된다. 백 데나리온 빚진 자는 엎드리어 간구하였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마 18:29) 그러나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는 그 동료를 용서하여 주지 않았다. 그런즉 용서의 의무를 알지 못하는 자가 됨으로 옥졸에게 넘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베드로의 질문의 의도를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자신의 의도함으로 용서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잘못된 생각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고 깨달은 자가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 받은 자가 자기가 탕감을 받은 은혜의 크기를 알아야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이전에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안다. 죄로 죽었던 자이며 하나님의 공의가 임하면 불 속에 들어 가야할 존재이었다. 그런데 구원의 문제가 내게 임하는데 있어서 내가 한 것은 아무 것고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을 받은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나의 죄 때문에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시며 죽으셨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것에 대한 가치를 아는 자가 일만 달란트를 받은 자이다. 그런데 이 가치를 모르면 이웃이 빚진 백 데나리온을 탕감하여 주지 못한다.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마 18:28) 용서는 용서를 베풀어 주는 자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되는 것이다. 죄를 지은 자는 두려운 마음이 있어 숨거나 거짓말을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 친히 찾아 가셨다. 그들의 수치를 가려 주기 위하여 가죽 옷을 주셨고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도 주셨다. “내가 너로 여자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살인자 가인에게도 먼저 찾아가셨고, 아브라함과 바울에게도 먼저 찾아가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우리들의 죄도 간과하시고 용서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1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들은 피조물이다. 이것을 깨달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 그래서 스스로 힘을 만들 수 없는 자인 것을 알게 된다. 즉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햇빛과 비를 주셔야 하고 자라게 해주셔야 한다. “그런즉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하) 먹는 일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구원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죄로 타락한 존재로서 스스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죄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펼쳐 주셔야 하고 날마다 말씀을 들려 주셔야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존재임을 말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믿는 자들과 세상 사람들은 분명히 차이가 난다. 믿는 자들은 영의 양식을 더 사모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어떤 음식을 먹더라도 늘 감사하므로 마주한다. 금식하면서도 기뻐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부요함이 신자들의 배를 부르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돼지와 같다. 먹고 먹어도 만족함을 모른다. 하늘을 쳐다볼 줄 모르고 땅만 쳐다보며 산다. 생명의 떡이 하늘에서 내려왔음을 모르고 생수가 반석에서 터졌음을 모른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밖에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숨을 쉬는 것과 밖에서 들어와야 한다. 먹는 것도 밖에서 들어와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이라는 존재는 영육 간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밖으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육신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육의 양식이 필요하고 영의 양식을 먹으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부요함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더러운 것들을 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1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었다. 그리고 지키라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여호와를 거룩하게 하는 날인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안식일 지키지 아니하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우상의 본거지로 이주를 시켰다. 왜 그런가 하면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며 이방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이제 그곳에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고 마음껏 우상을 섬기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그 백성들을 사랑하사 사랑의 매를 때리려 이방나라를 회초리로 사용하였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자들은 아버지라 부르는 권세를 가졌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잘 알 수밖에 없다. 한 집에 살면서 아버지를 늘 대하기 때문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이제 아버지의 뜻을 아는 자들이 되었다. 그 뜻은 아버지의 거룩함을 세상에서 믿음의 고백과 함께 행함으로 드러내라는 것이다.  즉 거룩하신 말씀을 지키므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함으로 죄인들에게 구원을 이르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이것은 전도와 선교를 말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주셨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늘 아버지께서 택함을 받은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다. 즉 믿는 자들이 아버지가 원하시는 기준까지는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야 한다.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야함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목적이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방나라에 전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더럽혀진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새 언약을 세우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백성들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이라 찬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6:23)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당연히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거룩함은 무엇으로 나타내야 하는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그러시면서 주신 것이 율법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또한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기도문은 어떠한 형식을 채우기 위하여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하...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신 5: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신 5:21) 탐내지 말라 함은 내면의 뿌리와 동기에 관한 것이다. 탐심이란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은 욕망과 남의 것을 갖고 싶은 욕망이다. 탐심은 우상숭배라 한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5)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함이다. 즉 자신에게 필요한 신 앞에서 정성을 바치고 능력을 얻으려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내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이웃이 행복하여야 한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더라도 나만 행복하겠다는 악한 마음이다.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에덴동산에 거하였던 아담과 하와도 마음의 탐심으로 인하여 쫓겨났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같아지려는 탐심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인라”(창 3:5)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으로 인하여 영원토록 즐거워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탐심은 나 자신만이 즐겁고 행복하겠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탐심을 이기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각 사람마다 받은 분복이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듯이 각 사람에게 내려 주신 은혜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제 10계명을 주신 이유는 현실에 만족이 아니라 더 높고 깊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이다. 나를 만족시키며 기쁘게 살아야 함이 아니라 이웃을 행복하고 기쁘게 살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라는 존재의 됨됨이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아야 ...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교회는 먹고 떠드는 모임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여 뜻을 같이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신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믿음의 공동체 안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때에 교회의 화평을 유지하기 위하여 용서해주는 방법과 용서받는 방법을 명령하셨다. 그런데 만일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저들은 이방인과 세리처럼 대하라고 한다. 그리고 출교를 시키거나 내쫓아내라 한다. 즉 범죄한 자에게 용서해 주는 문제와 죄 용서를 받는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매이기도 하고 풀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용서를 해 주는 것도, 죄 용서를 받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이 시행되는 곳이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먹고 마시며 떠드는 모임은 사탄의 회가 된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에 세워진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다툼과 분쟁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내가 어떻게 죄사함을 받았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면 형제의 범죄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 나의 죄도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다. 만일 지키지 않으면 이방인이 된다. 즉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의미는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합니다. 그의 명령을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하나님께 의존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한다. 공동체에 사람들이 모이면 범죄할 수 있고 다툼과 오해가 있을 수 있다.  만일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때에 화목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명령이다. 즉 용서의 의무와 권리를 말한다. ’의무‘라 함은 신자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인 것이고, ’권리’라 함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자유나 힘을 말한다. 범죄시에 용서의 방식대로 용서를 하고 받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그러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행하는 것이 된다. 신자들이 모인 곳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고 또한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이것을 명심하고 교인들의 모임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용서의 방식은 이러하다. 먼저 너와 그 사람만 상대하고, 둘째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라, 셋째 교회에 알리고 교회가 확인을 하고 교회 앞에서 공식적으로 확인을 하는 것이다. 이러하게 하는 것은 용서를 하는 자가 하여야하는 의무이다. 즉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여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만일 용서를 받을 자가 말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 한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 그리고 권리를 주셨다. 출교를 시키거나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고 한다. 이것이 용서하는 자가 받은 의무와 권리이다.  또한 죄인들은 명령에 순종을 하면 용서를 받을 권리가 있다. 그것은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공동체 안에서나 형제들 간에 범한 죄를 이 땅에서 풀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메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은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함께 합니다. 그의 명령을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신 5:20)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신   5:20)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법정에서나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즉 증인의 역할을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증인으로 살라고 한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6) 북 이스라엘에 아합 왕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사람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었다. 그것을 빼앗기 위하여 전 국민에게 금식을 선포하였다. 왕은 불량자 두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고 왕의 명령을 어기었다고 증언을 받아낸다. 즉 나봇이 하나님 앞과 왕 앞에서 명령을 어기어 금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무리가 나봇을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였다.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고”(왕상 21:13) 아합 왕은 나봇이 죽었다함을 듣고 포도원을 차지하러 간다.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왕상 21:16) 거짓 증인을 내세워 자신의 유익을 얻은 자의 말로는 비참하였다. 전쟁 중에 적군의 한 사람이 무심코 쏜 화살에 죽었다. 피를 흘리며 죽었는데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다고 한다. 그래서 거짓 증거와 증인을 막기 위하여 한 사람의 증인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신 17:6) 그런데 만일 거짓으로 위증하는 자가 재판정에서 거짓이 밝혀지면 그것에 해당되는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

“도둑질하지 말지니라”(신 5:19)

  “도둑질하지 말지니라”(신 5:19)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은 단순히 이웃의 것을 훔치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의미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번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다. 그것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한다. 즉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도둑질하지 말라함은 이웃의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유용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회생활에서 나타난다. 이것을 열매로 나타난다고 한다.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일로 드러낸다. 가장 무서운 죄가 이웃의 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다. 물질을 훔치는 것과 마음을 훔치는 것이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었다.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삼하 15:6) 그리하여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잘못된 사상으로 거룩한 것을 손상시킨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죄를 품으면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신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 1:15) 도둑질은 다른 사람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바가지 씌우는 행위이다. 또한 이웃과 함께 나눌줄 모르는 이기적인 행위이며 다른 사람의 행복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 하신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소유권은 인정하시나 소유권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