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19의 게시물 표시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예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 신학의 모든 지식이 교회를 향하고 있고 , 교회 안의 모든 요소는 예배로 , 예배의 꽃은 설교에 있다 .   성경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배시간에 맞추어 와야 한다 . 왜냐하면 순서 순서가 다 중하기 때문이다 . 만일 한 순서를 빠트리게 되면 다음 순서로 나갈 수 없다 .   왜 그런가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선포하고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시작이 된다 . “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요 4:23 하 -24).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간다 . 그분은 하늘 지성소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이다 .   대제사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하여 보혈의 피로 제사를 드리셔야 한다 . 왜냐하면 죄가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기 위해서는 죄사함을 위한 참회의 기도가 필요하다 . 이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예배 시작 전에 10~20 분 정도 미리 나올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   죄사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찬양도 드리고 , 감사 예물도 드린다 .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 , 즉 언약의 말씀을 듣게 된다 .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면 언약의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 들려지는 말씀에 아멘을 함으로 청종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확인함으로 언약을 갱신하게 된다 . 예배를 드리는 궁극적인 목적은 언약의 갱신이다 .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가 ? “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 히 8:10 하 )   예배당 문을 나설 때에 기쁨이 있다 .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 행 17:31 상 )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외쳐야 할 일이 있다 .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심판이다 .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며 ,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   왜 그런가 하면은 이미 “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 행 17:31 상 ) 라 하셨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증거로 “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 행 17:31 하 )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은 죄악으로 사망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게 되면 부활의 권능이 임하게 된다 . 그것에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사 언약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부활의 은혜는 죽어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도 누릴 수 있다 . 즉 ,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 자는 거듭난 자들만이 누리는 복을 누리며 사는 자들이다 .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는 자들은 생명의 더 풍성함을 얻게 된다 . 그 길을 가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하심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신자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   세상 속에서 신자의 삶이 기준이 된다 .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는 공의로운 자가 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교통 법규도 잘 지켜야 한다 . 고속도로에 제한 속도가 60 마일이면 그 이상을 달리면 안 된다 . 그리고 저울과 되를 속이면 안 되며 , 상한 것을 판매해도 안 된다 . 왜냐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시기 때문...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 시 8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에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 중에서 세금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다 . 그분의 대답은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막 12:17) 고 하셨다 .   혹자는 이러한 대답에 대하여 질문을 잘 피해 가셨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 왜 그런가 하면 로마의 화폐는 데나리온인데 가이사의 얼굴이 새기어 있었다 . 그 이유는 가이사는 로마의 신이므로 가이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고 해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친 것이다 .   반면에 유대인은 일 년에 한 번 성전세를 내어야 한다 . 그때에 내는 화폐는 세겔이다 . 성전세를 낸다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 된다 . 유대인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   오늘날에도 각 나라마다 화폐가 있다 .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나라의 역대 왕이나 대통령의 얼굴이 들어가 있다 . 미국 화폐에 1 불에는 ‘ 조지 와싱톤 ’, 20 불에는 ‘ 앤드류 잭슨 ’, 100 불에는 ‘ 밴자민 프랭크린 ’ 의 얼굴이 들어가 있다 .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그 나라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는데 목적이 있다 .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물을 선정을 하여 신격화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성경에서는 “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 시 82:6) 라고 하셨다 .   그런데 더 놀라운 말씀이 있다 . “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 시 82:1), 하나님께서 나라의 왕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 나라의 왕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데 ,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한 것과 하나님의 정의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말 3:10)   신앙생활 가운데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 목적을 이루려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다 . 그 가운데 하나가 십일조 헌금이다 . 십일조만 드리면 물질의 복을 많이 받는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   성경을 읽을 때에는 앞뒤문맥을 잘 살피어 한다 . 그런데 한 구절만을 살피면 전혀 다른 내용으로 비약이 될 수 있다 .   성경적은 복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데 있다 . 오직 이것만으로 약속하셨다 . ’ 오직 ‘ 이라는 것은 ’ 그것만 있으면 그것이 전부 ‘ 라는 의미이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시험하신다고 말씀하셨다 . 그런데 앞 구절들을 살피면 약속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상태에서 형식적인 십일조를 지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일조와 봉헌물은 율법의 정신을 따라 공의롭고 정직함으로 얻은 것에서 십일조를 원하시는 것이다 . 그런데 저들은 저울과 되박을 속이면서 얻은 소득으로 십일조를 드리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 즉 , 도둑질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도 율례와 법도와 명령을 따라 드려야 함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 오직 말씀 이외에는 어떠한 것으로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 .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 막 12:31)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은 세금문제로 ,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문제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책잡으려고 질문을 하였다 .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하여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 막 12:24) 하시며 저들의 무지함을 꾸중하셨다 .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하는 서기관의 질문이 이어진다 .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계명 가운데 크고 작은 계명은 없다는 것이다 . “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하는 자가 되나니 ”( 약 2:10) 라는 말씀을 기억을 하여야 한다 .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첫째는 “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 막 12:30)   둘째는 “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 막 12:31) 라고 말씀하셨다 .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이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율법이 강조하는 내용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의 핵심내용이다 .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마 7:12) 라고 율법의 참정신을 말씀하신 것이다 .   “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이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에 내 안에 들어와 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몰아내어야 할 수 있다 . 태초에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창 1:3), 말씀으로 시작하셨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 고후 2:9)   교회 안에서 진짜와 가짜의 싸움이 있다 . 다시 말하면 거짓 이단의 가르침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 개인과 개인의 다툼이나 집단과 집단의 갈등에서 진짜를 구별하는 법이 있다 .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행하여 서신서를 썼다 . 저들은 사도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공격이었다 . 저들의 주장은 사도바울의 사도권에 의심이 있다는 거짓교사의 가르침을 때문이었다 .   이러한 문제로 고린도교회와 사도바울 간에 갈등이 있었다 . 그래서 서신을 통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재차 강조를 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상기시켰다 .   그러나 아직도 거짓교사의 가르침을 따랐던 자들이 고린도교회에 남아 있다 . 이제는 거짓교사를 따르는 자들과 사도바울을 따르는 자들의 갈등으로 번지게 되었다 .   그때에 사도바울은 진리를 따르는 자들에게 권면의 교훈을 한다 . 너희가 진짜 교인이라면 시기와 분쟁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   “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롬 12:17),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제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 갈 5:13) 며 권면을 하고 있다 .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이 “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 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 갈 5:14-15) 는 것이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우리들의 싸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함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 하나님의 사람인 열린문장로교회 교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명령...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 시 81:10)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원하신다 . 그래서 고난을 통하여 기도제목을 주신다 . 그러면 기도제목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다 . 그리고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말씀을 주신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밀한 음성으로 역사하신다 .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와야 한다 . 그리고 그 말씀을 먹어야 한다 . 먹어야 힘이 되며 먹은 자에게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   그래서 말씀하신다 . ” 오호라 너희 목 마른 자들은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 사 55:1).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얻기 위하여 수고는 하지만 그것은 너희에게 배부름을 주지 못하고 너희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자는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는다고 하셨다 . 우리의 영혼이 가난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지 않고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가득 채워주셔서 , 세상이 주는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 오늘 글의 핵심은 문제만을 해결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   어부 시몬이 베드로가 되었고 , 폭력자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로 변하였고 , 천둥의 아들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도 동일하다 . 죄인인 나를 택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데 있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에게 침공을 당하였다 . 그래서 예루살렘 성읍은 불타고 백성들은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갔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   포로 생활 70 년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했지만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다 . 그렇다면 환전한 회복은 언제 , 누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가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진다 . 어둠 가운데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까지 주셨다 .   이 땅에 빛으로 오셨지만 ,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 빛이 어둠을 환희 비추고 있는데 볼 수 없는 자를 영적인 맹인이라 하는 것이다 .   빛 ( 주님 ) 이 내 안에 들어와야 한다 . 내 마음은 죄악과 어두움으로 가득차 있다 . 빛이 비추므로 인하여 어두움이 물러가고 하나님을 밝히 볼 수 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실패한 이스라엘에게 구원자가 되시고 이방인들에게는 광명한 빛을 비추시는 참 빛이 되신다 .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나 이방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아갈 수 있다 .   실패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접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 .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실패한 이스라엘이 새언약을 통하여 구원이 임하고 회복이 됨을 알아야 한다 .   징계를 받고 있는 시편의 기자의 간절한 기도이다 .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고 간절히 외치고 있다 .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 시 80:81)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마 7: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6 장에서 외식하는 자들과 그것에 대비되는 것을 말씀하셨다 . 외식이라는 것은 ‘ 바깥쪽을 장식함 ’ 이다 .   지난주일 말씀을 통하여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 그런데 나쁜 나무인 가시나무에 사과열매를 장식할 수 있는데 그것을 외식이라 한다 .   무슨 말씀인가 하면 나쁜 나무이지만 좋은 열매로 장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것을 겸양이라고도 한다 . 그 옛날 양반이 냉수를 마시고 이를 쑤셨다고 한다 . 현실은 굶주리고 있는데 고기를 먹은 것처럼 행세를 하였다는 것이다 .   왜 바깥을 장식하여야 하는가 ? 내면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 나의 내면을 예수 그리스도로 꽉 채우면 든든한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다는 것이다 . 우리들의 삶에서 집 문제가 안정적이지 않으면 마음의 평강과 자유를 얻을 수 없다 . 그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 집과 같이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 세상의 유혹과 핍박이 폭풍우처럼 닥쳐와도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왜 그럴까요 ? 사람은 자기의 눈으로 보는 만큼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주셔서 천지만물을 그분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셨다 . 그래서 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 그러므로 저 하늘의 세계를 바라보는 자는 이 땅에서의 유혹과 핍박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 막 12:10)   농부의 기쁨은 열매를 얻는 것이며 , 하나님의 기쁨은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 왜 계명에 순종을 하여야 하는가 ? 계명이 약속의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새언약을 약속하셨다 .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 . 그러나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메시야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   구약성경에서 건축자의 가장 큰 실수는 모퉁이 돌을 버리는 것이라 했다 .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들은 외면하고 버린 것이다 . 왜 그랬을까 ? 저들은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계명과 전통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의지적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지킬 수 있다 . 그래서 이것에 대한 이해로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통하여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얻을 수 있는 비유로 설명을 하고 있다 .   좋은 나무가 되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되면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성경적인 가르침은 좋은 열매를 맺자가 아니라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눈을 고정시킴을 말한다 . 그분이 말씀하신 성경의 말씀을 읽는 것이요 , 그분이 가셨던 발자취를 바라보는 것이다 .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실수를 우리도 할 수 있다 .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전하지 않고 행함이 없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문밖에 서 계시는 것이다 . 반석이신 모퉁이돌을 버리는 것은 건축자로서 자격이 없다 . 즉 분별력이 없다는 것이다 . 혹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문밖에 버리지는 않았는지 내 마음과 섬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