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자들이 선행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선행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정반대의 결과도 가져올 수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선행은 좋은 것인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의가 나타나고, 자기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은 신자들만이 온전히 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의 본질과 사랑을 전달하는 방법과 과정을 올바로 구분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지만, 사랑을 전달하는 과정을 본질이라 생각을 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친절하고 기쁨을 주고,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본질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친척과 형제만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도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셨다.
 
신자는 이전에 만난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다. 신자라면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자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있을 때에 찾아온 사랑이다.
 
내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이 내게 임하였다는 증거이다. 정말 놀라운 것이다. 내가 이웃을 사랑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자가 된 것이다. 세상을 향하여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순간이 된다.
 
만일 내가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면, 이것은 참으로 곤란한 것이다. 이것은 용기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교회 안에 사랑이 많다고 함은, 교회를 방문하였거나 새 식구가 오게 되면 먼저 다가서 믿음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반가움이 없고 늘 뒤에서 수군수군한다. 처음 만남에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살펴보고 신상정보를 캐려고 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이다. 그 사랑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웃을 죽이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하는 자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의 본질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이 전부라고 믿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친절하고 호의를 베푸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는 꾸짖음이 있고, 거부함이 있고, 냉정함이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거룩한 사랑은 진리 안에서 약속 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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