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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저거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음이니라”(수 21:44)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저거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음이니라”(수 21:44)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가나안 땅은 애굽의 토지와는 달리 비를 흡수하는 곳이다.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신 11:11) 그렇다면 어떠한 곳이기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그곳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준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안식과 평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전쟁이 번번이 일어난 장소가 가나안 땅이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주변의 모든 나라를 물리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저거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음이니라”(수 21:44) 주변의 나라들 가운데서 이스라엘과 맞설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오고 쉴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의 배경은 지금의 세계정세와는 다르다. 그 당시에는 전쟁을 통하여 남의 것을 빼앗아야 강국이 되고 부요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지키시기 위하여 전쟁에 앞서 나가셔서 승리를 하시고 기쁨의 전리품을 챙기게 하셨다.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승리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으면 천국을 갑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마 14:28) 예수님이 풍랑이 일고 있는 호수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베드로는 주님을 행하여 소리친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마 14:28)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라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간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마 14:29)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 물에 빠진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 14:30) 이 일로 인하여 베드로는 예수님께 꾸중을 듣는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 14:31) 왜 이와 같은 책망을 들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먼저 베드로라는 인물의 특징은 빠른 결단력과 적극적인 성품이며 정열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이다. 그가 복음서에서 보여 주는 인상은 시작은 잘하였으며 웅장하다. 그러나 문제에 빠지고 결과가 좋지 못하다. 예수님에게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결단코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배신하였었다. 베드로가 믿음이 작은 자라 꾸중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지적으로 아는 것이 없이 감성과 충동적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크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지적으로 알려고 하여야 하고, 회개(회심과 돌이킴)가 있어야 하며, 행할 수 있는 의지력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그리고 내가 열정적으로 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오셔야 한다는 것이다. 충동적으로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은 위험에 빠진다.  그래서 주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네 믿음대로 되리라“ 하셨다. 베드로는 열심은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마 14: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마   14:26)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을 표적이라 하였다. 표적이라 함은 사건 자체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시며 제자들의 믿음의 상태는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되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이적을 그의 아들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고 예수님은 산 위로 기도를 하러 올라 가셨다. 초저녁에 떠난 제자들은 밤 사경(새벽 3시~6시)에 이르기까지 호수 위에서 풍랑과 함께 하고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고 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마 14:25) 본문에서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호수에는 풍랑이 일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등장에 제자들의 반응이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놀라며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 떨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마 14:26) 이 말씀은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가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성육신 사건을 믿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랍비라고 따르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영원성, 불변성, 전능성, 편재성, 전지성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 바다에게 명하여 잔잔하라 명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눅 8:25)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5:2)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것은 그의 존재와 신뢰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으로서 인격과 순종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격스럽고 인격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주셔서 계명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한다. 그 이유는 그의 계명을 지키면 자랑스럽고 즐겁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그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기쁨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기므로 주인의 잔치에 참여한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기쁨과 영안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였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말씀에 결론을 내면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받을 수 있다. 그 크신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어 그를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함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감격스럽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다. 이 감격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할 수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5)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랑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말하며 듣고 순종의 자리로 나갑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고 그분의 의지적인 것을 내가 행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일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삼위 하나님께 함께 하셨음을 말한다...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수 20:6)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수 20:6)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배받은 땅에서 사회생활을 하여야 한다. 즉 사람들 간에 일어 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미리 법을 정하므로 인하여 정의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모세를 통하여 도피성을 세울 것을 지시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수 20:2) 도피성을 세우는 이유는 제 육 계명에 “살인하지 말라”(출 20:13)고 명령하셨는데, 살인한 자가 고의로 한 것과 부지중에 한 것을 구분하여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다.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러나 부지중에 살인한 자에 대해서는 피흘린 자의 손의 보복을 피하게 하기 위함이다.  가령 이웃과 함께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도끼날이 빠져 옆 사람의 머리를 맞아 죽게 되었다면 이것은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도피성을 요단 동편에 세 곳에 서편 세 곳에 세우라 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도피성을 세운다. 부지중에 살인한 자는 성 안으로 들어가지 전에 문 앞에 있는 장로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여야 한다.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 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수 20:4) 장로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 그 해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이다. 대제사장의 죽음은 속전의 의미가 있다.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수 19:49)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수 19:49)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하고 땅을 분배하는 일이 종결되었다. 이제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받는 장면이다. 여호수아도 갈렙처럼 약속의 땅을 받았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을 주셨다.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가기 거주하였더라”(수 19:50) 그것은 여호수아도 가데스바네아에서 성실히 정탐 보고한 대가로 그가 요구하는 기업을 우선 분배받을 권리를 하나님께 약속받은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호수아는 진정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임을 보여준다. 흔히 지도자들은 어떤 공적을 쌓으면 당장 자신의 사리 사욕을 챙기기 바쁘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모두 기업을 받고 난 후에야 자신의 기업을 얻었다. 이는 그가 사심이 없는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기업으로 받은 성읍은 완전히 파괴가 되었거나 새로 지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성읍을 재건한다. 그곳이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이다. 이스라엘의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일은 여호수아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지파의 족장들이 맡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나누었다. “제사장 엘르아셀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는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수 19:51) 이 일을 마친 후에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이 죽는다.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수 24:29),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였더라“(수 24:33) 즉 이스라엘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였던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이 죽으므로 인하여 각 지파가 받은 땅의 경계를 무르거나 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각 지파의 경계선은 영구적이 되는 것...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서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수 18: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서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수 18:1)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분배하다가 말고 여호와의 회막을 세운다, 그 이유는 땅 분배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기업을 분배 받았지만 아직도 일곱 지파라 땅을 분배받아야 했다. 그런데 요셉 지파에게 분배할 때에 거친 항의가 있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수 17:14) 그래서 길갈에 있었던 언약궤를 실로로 옮기고 회막을 세운다. 회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그리고 나머지 땅을 분배하는 것을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아서 해결을 한다. 여호수아는 일곱 지파에서 각 세 사람씩을 나오라 하여 나머지 땅을 보게 하고 일곱 부분으로 나눈다. “그들이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되 유다는 남쪽 자기 지역에 요셉의 족속은 북쪽에 있는 그들의 지역에 있으니”(수 18:5) 일곱 부분을 그림으로 그려 가지고 오라 하여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라 한다.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곳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수 18:6) 제비 뽑기는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친히 명령하셨다. “오직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그들 조상 지파의 이름을 따라 얻게 할지니라”(민 26:55) 그래서 제비를 뽑는 자는 사람이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이 방법은 선지가가 등장하고는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도를 뽑기 위하여 잠깐 사용되었다.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수 17:12)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수 17:12) 서쪽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가 땅을 분배 받고 자손들에게 땅을 분배한다. 열 분깃으로 나누었는데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도 포함이 되었다. “요단 동쪽 길르앗과 바산 외에 므낫세에게 열 분깃이 돌아갔으니”(수 17:5) 이 약속은 모세 때에 하였던 것으로 여호수아가 제사장 엘르아살과 지도자들 앞에서 분깃을 나누어 주었다.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같은 지파 사람와 결혼을 하여야 한다. 그래야 므낫세 지파의 땅이 다른 지파로 넘어 가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각 지파별로 분배를 받고 지파는 분깃을 나누었다. 땅을 나누는 동안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못 하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 7:2) 반면에 그 땅에 사는 가나안 주민들은 결심을 하고 거주하였다.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수 17:12) 신앙의 나태함을 보임으로 약속의 땅을 쟁취하지 못한 것이다. 즉 그 땅의 주민들은 유혹과 교묘한 수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나안 주민들에게 마음 빼앗김으로 인하여 우상숭배의 자리로 간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의 신이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든지 하나를 택하라 한다.  “만일 여호와를 삼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혼합주의였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신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