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오늘 아침에는 머리가 혼잡스러울 정도로 띵하였다. 목사가 죽으면 어떻게 평가를 할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그 목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인들을 사랑하였다는 기억으로 남을 수 있고, 성경의 말씀을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전하였다든가, 아니면 열정적으로 강단에서 외쳤다고 평가를 할 것이다.
 
그런데 목사들이 모든 것에 달란트가 있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은 목사의 한 부분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알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올바른 뜻을 전하였다는 말이 제일 좋을 듯하다.
 
기독교가 혼란 가운데 있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로서 풀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자아로 풀 것인가의 차이이다. 그런데 요즘 인기 있는 해석이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자아를 섞어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선배이면서 훌륭한 신학자신 목사님들의 신학을 보면 완벽하게 증거하신 분은 없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완벽한 신학적 증거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그러니 목사는 사람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여야 한다.
 
개인의 자아가 철학이다. 철학은 사람의 생각이다. 철학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셨을 때에 개인의 전 인격을 사용하셨다. 그래서 유기적 영감이라 한다. 성령께서 저자의 생각을 주관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은 개입이 될 수 없었다.
 
만일 성경의 말씀에 철학을 동원하여 해석을 한다면 자연인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머리로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가슴으로 깨닫는 것이다. 즉 마음이 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이 변하게 된다.
 
강좌는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니 들은 자가 알아서 적당한 곳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는 듣는 자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회심, 회개의 역사가 있고 사람에서 그 길을 가게 하는 역사가 있다. 이 과정 속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세상은 진리를 담고 있지 않아서 늘 변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새로운 것이다. 이단들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것이라 하며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그러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팠다. 그랬더니 물이 나왔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이 임재 하셨던 곳, 하나님이 복을 주신 곳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성경의 해석 있고, 전통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셨기에 오늘까지 전통적인 예배방식이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이단들은 그런 전통의 방식을 부정하려 한다. 왜 전통의 형식이 중요하는가 하면, 그래야 내용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담겨져 있다. 이것을 무시한다는 것은 그동안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들을 무시하려는 교만한 마음 때문이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전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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