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신자들은 날마다 영적인 싸움을 한다. 그런데 이 싸움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죄와 친밀하게 지내왔던 자들이다. 그러다 보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죄를 향하여 간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마음이 하는데 그것을 억제하는 싸움이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신자는 온전한 자인데 마귀에게 도전을 받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죄는 사탄이 지은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 않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죄사함을 받은 것이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을 막는 것이다. 그러니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분으로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되었고, 아직도 죄인의 성품을 갖고 있어서 범죄 할 수 있다. 신자의 거룩한 삶은 죄의 성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죄는 언제나 나를 유혹한다. 성질을 부리게 하고 시기와 질투를 하게 한다. 그러나 신자가 되었다 함은 성질을 다스리고 시기와 질투를 멀리 쫓아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착한 행실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 앞에 서는 것이다. 즉 구원 받은 자의 모습 착한 행실 하는 자의 모습으로 전도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게 되면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다가 막상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실망을 한다. 그러나 실망을 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만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에게 있다. 그렇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막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전도를 하여야 한다. 우리는 중매쟁이로서 예수님과 구원 받을 자를 소개하는 자세로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실수는 내가 하려는데 있다. 나의 실력으로 상대를 항복하게 하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죄인을 구원하는 사역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같은 것이다.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죄인의 마음에 빛을 비추게 하는 창조사역이다.
 
예수님께서 죄인이었던 사울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통하여 이해 할 수 있다. 가난한 자를 찾아 가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가신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죄인으로 로마를 간다. 그곳에서 십자가에 순종함으로 로마를 정복하게 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자기의 생각이나 철학의 아름다운 말로 전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고 경계하였다.
 
착한 행실에는 언어가 필요 없다. 몸동작은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이다. 겸손을 표현하는 것은 말보다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간단하고 쉽다. 또한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도 말로는 어렵다. 오히려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쉽다. 이것이 우리의 선한 일이 되는 것이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