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요즘 인간의 삶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인문학 강의의 주제인 나는 누구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이 사람들의 고민은 본래 인간은 오늘날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탁월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인간은 돈에 지배받으며 살도록 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자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 고민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일주일의 삶 가운데 육일은 돈과 더불어 살다가 주일날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내안이 그리스도가 있음으로 인하여 주님께서 나를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술 더 떠서 주님의 뜻이라고도 말한다.
 
교리 가운데 칭의와 성화가 있다. 구원의 도리를 논리적으로 나누고 설명하기 위하여 나눈 것인데, 이 둘은 떨어 질레야 떨어질 수가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 칭의를 받은 사람은 성화의 과정 속으로 들어감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생명을 갖고 있는 것들은 성장을 한다는 원리이다.
 
하나님의 은혜인 칭의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생명체로서 새롭게 태어났다. 엄마를 통하여 태어난 아이는 엄마의 젖을 먹고 자란다. 단지 엄마의 젖만을 먹는데 쑥쑥 자란다. 참으로 신비롭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에게 신령한 젖을 먹으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라는 것이다.
 
성경의 교훈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상식으로 말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사람으로서 할 도리를 배우게 된다. 즉 습관을 키운다고 한다. 좋은 습관은 사람으로서 평생 동안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교훈하고 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함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을 받다가 보면 내가 누구인지를알게 된다. 왜냐하면 나를 만드신 창조주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분이 나를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었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창조주가 목적한대로 살아야 최고의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의 인문학은 그 주제의 고민을 사람으로부터 시작을 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철학자들의 사상과 지혜를 동원하여 출발한다. 그러니 같은 고민을 하더라고 한 쪽은 창조주로부터이고, 또 다른 한 쪽은 인간으로부터이다. 그러므로 고민에 대한 해결책의 내용물은 완전히 다르다. 즉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으로다.
 
당분간은 인문학 강의가 대세를 이룰 것이다. 왜냐하면 돈이면 무슨 짓을 하게끔 하였던 천민자본주의가 몰락을 하여 파멸의 길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생각없는 목사들이 그 내용을 그대로 카피하여 설교시간에 전함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인문학 강사를 모셔다가 강단에 세울 것이 분명하기 하다.
 
그리스도인은 하루, 하루를 아니 한 순간, 한 순간을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나의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거룩함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세상은 일요일이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이라 한다.
 
안식일을 주장하는 자들이 주일에 대하여 시비를 건다. 그렇다면 왜 주일이 거룩하고 옳은지를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한다.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는 날이다. 부활을 통하여 천국을 올라가게 됨으로 인하여 참된 안식을 얻게 됨으로, 주일이 오히려 참된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외적으로 세상에 선언을 하고 세상에 도전을 하는 외적인 표현이다.
 
사람이 가장 기쁨을 느낄 때는 의로운 일을 했을 때라고 한다. 길을 가다가 강도를 잡거나, 사고로 인한 자의 생명을 구하였을 때이다. 그래서 나라에서도 이러한 자들에게 표창장과 상금을 준다. 왜 그럴까, 의로운 행동을 더 많이 하기 위한 장려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그래서 이제 배워야 하는 것이 그의 나라의 의이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의를 배워서, 그대로 순종을 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또 배운 대로 세상에 알려야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만 순종하고 영광만을 배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내가 얻은 기이한 십자가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 하며, 또는 빛의 아들이라 하며 어두움의 세력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노는 자들이 너무 많다. 어두움 속에서 빛의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빛이라 하는데 어두움이 물러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빛이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신앙인의 삶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더 큰 의미가 있다. 이 속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참 맛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물질주의 빠져서 고민하는 문제의 답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는 누구일까?”에 고민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수준은 벗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허망한 곳, 방탕이 방임하는 곳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 곳을 빠져 나와 든든한 반석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다.
 
왜 하나님이 나를 그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구원하였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그분의 양자로 삼으셨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여야 한다.
 
당신이 진정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이것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주님이 피흘린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음을 아직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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