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응보의 정죄를 넘어선 대속의 은혜(욥 8:4)
인과응보의 정죄를 넘어선 대속의 은혜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으니” (욥기 8:4)
1. 빌닷의 인과응보, 그 종교적 정죄의 한계
수아 사람 빌닷은 앞서 말한 엘리바스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냉정하게 인과응보의 논리로 욥을 공격합니다. 자녀들이 주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다는 참혹한 정죄입니다. 그가 내세우는 판단의 근거는 조상들의 지혜와 오랜 전통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을 건냅니다.
그러나 빌닷의 철저한 인과응보적 판단은 고난받는 자를 향한 종교적인 정죄일 뿐입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학의 치명적인 한계는, 죄의 결과로 인한 파멸죽음 외에 하나님의 깊으신 신비나 은혜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2. 파멸의 자리에 대신 버려지신 예수 그리스도
빌닷은 ‘죄를 지었으므로 그 범죄에 버려두셨다’고 당연하게 말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나타난 신비한 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단 하나의 죄도 범하지 않으신 흠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을 영원한 심판과 참혹한 죽음의 자리에 그대로 버려두셨습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을 당연한 파멸로만 보았던 빌닷의 시선과 달리, 구속사는 인간이 받아야 할 그 파멸의 자리에 대신 들어가 외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뿌리째 뽑히는 마름을 당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버려지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 가운데 잠시 무성하다가 결국 뽑혀 나갈 수밖에 없던 우리가 영원한 생명수 시냇가에 다시 심긴 복된 가지가 된 것입니다.
3. 미약함과 낮아짐으로 성취된 진정한 창대함
또한, 회개하면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처음보다 더 큰 부자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빌닷의 제안은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인간의 행위를 대가로 요구하는 조건부 계약이 아닙니다. 복음이 말하는 바른 믿음의 길은 높아짐이 아니라 도리어 낮아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가장 미약한 모습이었습니다. 화려한 궁궐이 아닌 베들레헴 낮은 말구유에서 탄생하셨고,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져 죽임당하실 때는 완벽한 실패자처럼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겸손한 마음으로 죽기까지 아버의 뜻에 복종하셨고, 그 낮아짐을 통해 만유의 주로서 가장 창대하게 되셨습니다. 바울은 이를 두고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라고 선언합니다.
4. 거미줄 같은 내 의를 버리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받는 이웃과 성도들에게 세상의 얄팍한 논리로 상처를 주지 마십시오. 인간의 회복과 치유는 조건적인 훈계가 아니라,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더 크신 섭리와 영광을 보여줄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대가를 바라는 율법적인 믿음의 행위를 멈추고,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낮아짐의 은혜를 구하셔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떠난 자가 의지하는 모든 것이 결국 ‘거미줄’ 같아서 쉽게 끊어지고 말 것이라 고백했습니다(욥 8:14). 인간의 힘과 지혜는 그와 같이 나약합니다. 성도의 진정한 창대함은 이 땅의 소유를 늘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생명의 풍성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의를 의지하려는 영적 교만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완전한 대속만을 의지하며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성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엘파소 열린문 장로교회 장용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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