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이후에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죽든지 살든지 주의 것으로 자기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는 삶을 살았다. 이것을 좀 구체적으로 전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남을 생애를 헌신하겠다는 것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받는 고난도 즐거움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주님의 몸된 교회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무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의 얼굴을 보지 못한 교회에도 편지를 보내게 된다.
 
얼굴도 보지 못한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다 보니 바울 자신에 대한 소개가 있어야 했다. 즉 자신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며,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를 서신서에 적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좋은 소식이라 한다. 그 이유는 죄의 책임으로 인하여 지옥불에 가야만 하는 자들에게 그 길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에 좋은 소식이다. 그래서 좋은 소식을 전하기 전에 먼저 등장하는 단어가 경고이다.
 
세례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였고, 사도 베드로도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외쳤다. 사도바울도 만찬가지이다. 각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경고의 메시지를 먼저 전하는 것이다. 구원을 왜 받아야 하는지를 전하고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의 심판이 있다는 것이고, 두 번 째는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완전한자로 서게 함이다. 만일 이와 같은 분명한 목적이 없이 사람이 모여 있다면, 그곳은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러니 교회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한 자들이 모인 곳이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완전한 자가 되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생각도 없이, 목적도 없이 교회에 나오는 자들이 너무 많다. 자기의 생각이나 철학을 전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며 깨우쳐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들을 구원하였고, 어떤 지혜와 비밀로 일을 하고 계신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자들이 배우기를 싫어한다. 오히려 선생이 되려 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신자는 죽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하고, 다가올 영광의 그날에 대한 영광으로 기쁨이 넘쳐야 한다. 그가 서신서에서 전하고자 하는 말씀이 이것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니 감사와 재림에 대한 소망과 준비가 없는 교회는 방향을 잃은 교회이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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