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지기 말라
교회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을 이루는 곳이 아니다. 소위 코드가 같은 사람들이 만나서 비전을 함께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십자가를 걸고 있는 교회마다 구호와 목적이 각각이다. 그러나 교회는 먼저 영혼을 구원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거듭난 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즉 중생한 자들의 모임이다. 영적인 새로운 씨를 주신 것이다. 생각과 판단을 하는 기능이 영적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성경의 증거는 거듭난 자들의 모습이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있다. 그는 다소의 사울이었을 때에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이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전에 알지 못하던 복음을 알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할 때의 열정으로 복음을 이방에 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고상한 것 외에는 다 배설물로 여긴다는 고백을 하였다. 거듭난 자는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뀐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용하게 된다. 음악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던 자가 거듭나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찬양을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위대한 중생의 교리가 있어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이 거듭남의 교리를 교묘한 거짓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단의 뻔뻔함을 언론을 통하여 듣고 있다. 이단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곳도 예외는 아니다.
신자라고 하지만 거듭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돈을 더 사랑한다. 부요한 삶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기면 금방 시험에 든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었지만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생을 얻고 부활에 이른다고 하자, 그들은 주님을 떠났다.
이런 자들은 거듭남이 없는 자들이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이러한 자들이 너무 많다. 신자라고 하면서 육신의 일을 따르는 자들이다. 즉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한다.
겉모양과 예배의식에는 아주 익숙한데, 삶에서 생각이나 행동이나 만나는 사람들은 육에 속한 사람들을 만난다고 하면 과연 이러한 자들이 거듭난 것인지 확인을 하여야 한다. 거듭난 자들은 세상의 사람들과 갈등을 할 수 밖에 없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하셨다. 그래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가족과 가족 간에 싸움이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신자가 세상 사람을 만나도, 이단을 만나도, 아무런 갈등이 없다면 거듭남의 역사가 없었던 것이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심기운 자는,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당연히 멀리 한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지기 말라”(요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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