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레 14:10)

  “여덟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레 14:10) 레위기 14장은 나병 환자가 진찰을 받고 나았으면 정결 의식을 행하여야 한다. 먼저 1차 정결 예식을 치루고 7일이 지난, 그 다음날인 8일에 2차 정결 예식을 드린다. 1차 정결 예식은 진영 밖에서 제사장이 환자를 확인한 후에 나았으면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다가 새 하나는 흐르는 물위 질그릇 안에서 잡는다. 그리고 다른 새는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흐르는 물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린 다음에 들에서 놓아 준다. 물위에서 죽은 새는 일차적으로 나병환자의 부정을 속죄하기 위한 희생제물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죄인들의 짐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 그리고 들판에 날려보낸 새는 나병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음을 말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영생을 얻게 된 것을 상징한다. 백향목은 곧게 위로 뻗어 품위가 있고, 강하며 광택과 향기가 있으며, 죽음을 극복한 생명의 능력을 상징한다. 홍색실은 붉은 피를 상징하는데 회복된 혈색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는 구원의 능력을 말한다. 우슬초는 박하초 식물로서 썩음의 악취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이 된다. 1차 정결 예식을 마친 후에는 옷을 빨고 몸을 씻은 후에는 집으로 들어갈 수 없고 장막 밖에서 칠 일을 지내야 한다. 병자가 온전한 정결을 유지하는데 소요되는 날 수를 말한다.  칠 일이 되면 다시 옷을 빨고 몸의 털을 제거하고 목욕을 한다. 그리고 다음날 즉, 팔일째 되는 날에 여호와의 처소인 회막에 나아가 희생제사를 드려야 한다. 2차 정결 예식을 말하는 것이다. 팔일에 드린다 함은 죽었다가 살아남을 뜻하는 것으로 부활의 숫자이다. 나병환자가 드렸던 제사는 속건제, 속죄제, 번제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이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레 13:3)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이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레 13:3) 레위기 13장에서는 나병에서부터 일반적인 피부병까지 소개하고 있다. 사람의 몸에 생긴 것과 가죽 옷과 가옥에 곰팡이가 발생해도 이를 나병이라 한다. 나병은 균에 의하여 피부라든가 점막, 말초신경, 내장 들에 발생하는 만성 전염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세균의 활동으로 눈썹, 빰, 코 및 귀에 결절이 생기며 심지어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게 된다. 발병원인은 기후 및 환경 조건 그리고 위생학적인 부주의로 생긴다. 고대인들은 나병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나병을 저주의 결과라고 언급한 부분이 없다. 단지 미리암이 범죄했을때 하나님께서 형벌로 그 질병을 내리신 적은 있었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민 12:10) 본문에서와 다른 곳에서 나병을 경계하는 것은 죄의 무서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나병이 지니는 전염병, 치명성, 격리성 등은 죄의 무서운 속성으로 파괴성, 분리성, 전염성, 침투성 등을 생생하게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도 외형적이고 육체적인 나병을 통하여 내적이고 영적인 죄의 치명성과 무서움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은 영적인 감각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찔림이나 아픔이 없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은 양심에 화인 맞은 자라 하였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자가 되면 영적인 감각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죄에 대한 심각성과 두려움이 생기게 된다. 구약에서는 나병의 증세가 있는 자들은 제사장에게로 가서 진단을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죄악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부정한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도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레 12:6)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도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레 12:6) 산모가 아이를 난 후에 정결해 지기 위한 법이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칠일 동안 부정하여 타인을 만날 수 없고, 삼십 삼일 동안에는 성물이나 성전에 나갈 수 없다. 여자 아이를 낳으면 십사일동안 타인을 만날 수 없으며, 육십육일 동안 성전에 나갈 수 없다. “여자 아이를 낳으면 그는 두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월경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육 일을 지내야 하리라”(레 12:5) 남자 아이를 낳은 산모는 사십일이 지나면 성소에 나가 정결예식을 드려야 한다. 드려야 할 제사는 번제와 속죄제이다. 사십일 이라는 시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낳은 아들이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인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부정한 것으로 여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그 기간동안에 자신이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다. 사십일을 상징하는 것은 모세가 여호와에게 두 돌판을 받기 위하여 두 번이나 사십일 동안을 지냈으며, 엘리야는 천사가 공급하여 주는 음식을 먹으며 사십일 동안 걸어서 호렙산에 도착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십일 동안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셨다. 즉 시험의 기간으로 믿음을 단련하는 것이다. 번제를 드리는 이유는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며, 속죄제는 출산한 여인의 부정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제물로는 번제에는 어린 양을 드려했고, 속죄제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로 드렸다. 즉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에도 번제드렸다.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눅 2:23) 그리고 속죄제도 드렸다. “또 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택함을 받은 백성들도 거룩하여야 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살다가 나왔다. 그곳에서의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이방사람들과 구별된 정결한 식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먹을 수 있는 짐승은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것들이다. 소, 양, 염소, 사슴, 노루 등이다. 이 짐승들은 풀을 먹고 사는 깨끗한 짐승들로 다른 것들에 해를 끼치지 않고 조용하고 평화스럽다. 굽이 갈라졌다함은 세상과 구별이 된 것이고, 되새김질한다는 것은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늘 묵상함으로써 영적으로 소화기키는 것을 암시한다. 특히 땅에 기는 것이나 죽은 것에 대하여 심히 경계하고 있는 것은 죄로 인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먹지 말라한 것이다. 반면에 하늘을 향하여 뛰어오를 수 있는 메뚜기와 베짱이, 귀뚜라미, 팟종이는 먹을 수 있다. 성경에서는 하늘의 것은 영적인 것으로 땅의 것은 세속적인 것의 상징으로 많이 쓰였다. 주검을 만지면 옷을 빨아야 하고 해지기 전에는 집에 들어올 수 없다. 그 시간 동안에 회개를 하여야 한다. 또한 주검과 접촉된 물건들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 이렇게 외적 부정을 제거하는 각 종 정결법의 교훈은 곧 내적이고 영적인 정결의 문제로 연결됨을 보여 주고 있다. 신약에서 더럽고 추악한 옷을 입은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거룩한 흰옷을 입히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선한 말씀을 주셨다. 즉 새포도주를 담기 위하여 새부대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만 상대하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은 백성들에게 정결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전에 마귀의 종이었을 때의 습성과 죄악으로부터 분별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또는 나의 생명의 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 생각을 한다. 그래서 늘 자기 중심적으로 이기적인 삶을 산다. 그러다보니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끊이지를 않는다. 그들의 결국은 사망의 그늘 아래에 거하다가 멸망하게 된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하)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사망안에 있는 자들에게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즉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을 얻으므로 인하여 생명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인으로 알고 따르는 자들을 생명의 길을 가는 자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순종하며 가는 길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며 천국을 가는 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래서 예수가 나의 삶에 주인이 되셔서 이와 같은 고백을 하여야 한다. “내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러한 믿음과 신앙을 따르는 것이 좁은 길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다. 즉 좁은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자들이 가는 길이요, 넓은 길은 진노의 심판을 받을 자가 가는 길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의 문제를 내가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것이 넓은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왜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 7:13) 좁은 길은 어떤 길이며, 왜 가야 하며, 좁은 길을 가면 어떤 유익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하시기를 넓은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좁은 길을 가라 하신다. 좁은 길은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가는 길이다. 반면에 넓은 길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자들이 간다. 넓은 길은 가는 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욕심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좋은 집과 차 그리고 명품을 소유하며 살고 있지만 예수님을 모르는 부류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도 잘먹고 잘사는 부류들을 부러워한다. 그런데 인생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 때에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에 대한 심판이 있다. 이러한 진리를 전하는 곳이 교회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하심을 깨달은 후에는 좁은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시편 기자의 고백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 또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권면을 하고 있다. 고린도 지방은 항구도시로서 부유하며 지식이 많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하였던 일을 소개하고 있다.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렸을 때에 장대에 놋뱀을 달아 쳐다보라 하였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라”(고전 10:9) 그들의 생각으로는 놋으로 만든 놋뱀을 장대에 달아놓고 쳐다보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놋뱀을 쳐다본 자들은 고침을 받고 살게 되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누구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놋뱀을 쳐다 본 자들이다. 반면에 넓은 문으로 간 사람들은 죽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과 시험 가운데 계십니까?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구원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에게 있다. 죄인을 사망에서 꺼내어 생명을 주시는 능력을 복음이라 한다. 그 구원의 결과로 우리들이 있는 것이다. 구원을 얻은 자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고 오래참으며 인내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설명을 선지자 하박국을 통하여 할 수 있다. 선지자의 호소는 어찌하여 같은 이스라엘 민족끼리 본쟁을 하며 싸울 수 있습니까, 어찌 악인들이 의인들을 삼킬 수 있습니까 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묵시는 정한 때가 있으나 그 종말은 속히 이르겠다고 하셨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악인들은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거짓되고 정직하게 살지 못하나, 의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땅 위에 세우진 나라들은 쉬지 않고 서로 싸우고 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타인의 것을 빼앗는 정신으로 산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즉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완성시키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그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오래참고 인내하여야 한다. 오래참음과 인내는 하나님의 고급스러운 인격으로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한다.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즉 고급스러운 인격을 가진 사람은 주먹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의인들은 믿음으로 사는데 결국에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